미국의 노예제가 1860년대 남북전쟁 중에 폐지됐고, 그 배경에 노동력이 필요했던 북부 산업자본과 내전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연방주의자들의 계산이 있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흑인 노예노동에 기반한 대농장 중심의 남부는 노예제 폐지로 경제의 전통적 토대와 함께 전쟁의 명분도 잃었다.
똑같지는 않지만, 유사한 일이 딱 100년 전인 1760~70년대 미국 독립전쟁 중에도 있었다. 뉴잉글랜드의 작은 주 로드아일랜드 의회가 1774년 6월 13일 노예제의 점진 폐지를 법제화했다. 세금과 무역규제를 둘러싸고 영국 왕실과의 긴장이 고조되던 때였고, 해방 노예는 군인으로 동원할 수 있는 예비 자원이었다. 로드아일랜드가 그해 인구조사를 실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로드아일랜드는 17세기 이래 북미 노예무역의 거점이었다. 브라운대학 자료에 따르면, 남북전쟁 이전인 19세기 중반까지 아메리카 대륙에 끌려 온 아프리카 노예는 약 1,200만명으로, 대부분은 카리브해를 통해 중남미 지역으로 흘러갔지만, 북미로도 전체의 약 5%인 60만명 정도가 흡수됐다고 한다. 그중 약 10만명이 로드아일랜드를 통해 끌려왔다. 당시 뉴잉글랜드의 주력 산업도 농업(및 어업)이었고, 로드아일랜드는 카리브해의 당밀(사탕수수)로 럼주를 제조해 그걸 카리브해 국가들에 수출해 노예를 수입하는 삼각무역의 거점이었고, 뉴포트는 북미 최대 노예무역항이었다.
로드아일랜드는 1769년 뉴포트항의 영국 선박에 불을 지르며 영국 지배에 저항한 최초의 식민지 중 한 곳으로, 인근 매사추세츠에서 시작된 독립 전쟁에 지원병을 파견하며 전쟁에 가담했다.
로드아일랜드의 노예제 폐지의 시작은 1652년 5월의 반노예법이었다. 그 법을 주도한 것은 초기 퀘이커교 평화주의 정착민들로 그들은 “네가 대접받고자 하는 바에 따라 타인을 대접하라”는 성경 지침에 따라 노예제에 반대했다. 노예 소유권을 최장 10년만 인정하는 것이 골자였던 1652년 법은 하지만, 위스콘신 매디슨대학 연구에 따르면 유명무실했다. 1750년 무렵 뉴잉글랜드의 흑인 노예는 총 인구의 약 10%로, 당시 북미 평균의 약 2배였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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