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뜩 연기로 눈길 ‘확’… “스포일러 막으려 칸 레드카펫 못 섰지만 봉 감독 리스펙!”
※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 ‘기생충’ 개봉 전 기자들에게 글을 띄웠다. “공개된 예고편 이후의 스토리 전개는 최대한 감춰 주셨으면 한다.” 존재만으로도 스포일러인 두 배우, 이정은과 박명훈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기생충’에 가난한 기택(송강호)네 가족과 부유한 박 사장(이선균)네 가족 말고 또 다른 가족이 나온다고, 컴컴한 지하로 쫓겨난 애달픈 삶이 있다고, 기생 아래 또 다른 기생이 있다고 말이다. ‘기생충’이 700만 관객을 돌파하고 나서야 ‘묵언수행’에서 풀려난 박명훈을 11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났다.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렸습니다.” 묵은 체증까지 뻥 뚫리는 이 한 마디 말과 함께 기나긴 침묵의 시간이 드디어 끝났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기분”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배우 박명훈(44)은 영화 ‘기생충’과 봉준호 감독이 최후의 순간까지 꽁꽁 숨겨둔 비밀병기였다. 박 사장네 집 지하 밀실에 숨어 살던 남자 근세. 폭우가 쏟아지던 밤 찾아온 문광(이정은)에게 멱살 잡히듯 끌려 내려간 그곳에서 기택네 가족은 근세를 발견하고 경악한다. 극장에서도 “헉” 하고 소리 없는 비명이 터졌다.
박명훈은 촬영을 시작한 지난해 5월부터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활동을 끊었다. 심지어 촬영을 마치고도 새 작품 출연을 미뤘다. 올해 칸국제영화제에도 함께 갔지만 그는 눈에 띄지 않게 숨어 다녔다.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흔적을 지웠다. 그래서 더욱 극적인 등장이었다. “레드카펫에 서지 못해서 아쉽지 않냐는 분들도 있는데, 전혀요. 오히려 짜릿했어요. 저만 아는 비밀을 마음껏 즐겼습니다.”
영화를 본 관객이 품은 가장 큰 궁금증. 봉 감독은 박명훈을 어디서 찾아낸 걸까. 2017년 봉 감독의 영화 ‘옥자’와 박명훈이 출연한 독립 영화 ‘재꽃’이 같은 시기 개봉하면서 둘의 인연이 시작됐다. 당시 ‘재꽃’을 관람한 봉 감독은 극찬을 남기며 박명훈을 특별 언급했다. “대단한 배우다. 술 취한 연기는 세계 최고다. 술 취함의 레벨을 주종 및 시간대에 따라 다르게 연기하는 게 압권이다. 약간 실례지만 독특한 치열과 안구로도 독특한 뉘앙스를 뿜어낸다.”
봉 감독의 안목은 탁월했다. 박명훈의 형형한 눈빛은 공포스러웠고, 어눌하게 변주한 말투는 측은함을 자아냈다. “리스펙”이 절로 터지는 명연기였다. 박명훈은 촬영을 앞두고 체중을 8㎏ 줄이고 머리 숱을 쳐내 외모도 싹 바꿨다. 하지만 박명훈은 “그로테스크한 설정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했다. “근세는 평범만 소시민이라고 생각해요. 사업 실패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을 뿐이죠. 촬영하기 한 달 전 세트에 가서 발을 붙여 봤어요. 암흑 속에 누워 있어 보기도 했고요. 지하 공간에 홀로 있으면 누구나 변할 수밖에 없어요. 정신이 멍해지고 시선에 초점도 없어지죠.”
박명훈은 봉 감독에게 특별한 “리스펙”을 표했다. 봉 감독은 영화 개봉 전 극소수 스태프만 참여한 시사회에 박명훈과 암투병 중인 그의 아버지를 초대했다. 기뻐하던 아버지 모습을 박명훈은 잊지 못한다. “아버지가 가족한테도 스포일러를 안 하시더라고요. 투병 중인 아버지께 힘이 된 것 같아 뿌듯했습니다.”
박명훈은 이제 막 대중에 알려졌지만 연극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다. 연극영화과 입시에 떨어지고 행정학과에 진학했지만 끝내 꿈을 떨치지 못해, 군 제대 직후인 1999년 대학로로 갔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카르멘’ ‘라디오스타’ ‘명성황후’, 연극 ‘놈놈놈’ ‘쓰루 더 도어’ 등 숱한 무대에 올랐다. 아내 문광 역을 맡은 이정은과는 2005년 연극 ‘라이어’를 6개월간 함께 공연했던 사이다.
2015년 독립 영화 ‘산다’로 처음 스크린을 경험했고, tvN 드라마 ‘또 오해영’(2016)에선 주인공을 위기에 빠뜨리는 악역으로 나왔다. ‘기생충’은 그에게 또 다른 기회를 열어 줬다. “마흔 살에 결혼을 하고 영화에 도전했어요. 무명이지만 누군가는 알아봐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이었죠. ‘기생충’ 찍으며 영화에 매력을 느꼈어요. 앞으로도 다양한 캐릭터로 관객을 만나고 싶습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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