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가로스 유일한 한국인 공식 스트링어, 즈베레프·할렙 테니스채 책임져
낯선 한국인 못 믿던 스트링어들 작업한 라켓 보고 “뷰티풀” 연발
“인간이 아니라 외계인이 한 것처럼 완벽한 스트링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왜 하필이면 가게 이름이 ‘에일리언 스트링 워크샵’이냐는 질문에 스트링어(stringer) ‘김대장’ 김종욱(44)씨는 이렇게 답했다.
김종욱씨는 올해 프랑스오픈에 참가했던 유일한 한국인 공식 스트링어다. 라파엘 나달(33ㆍ2위ㆍ스페인)의 12번째 우승으로 끝난 이번 대회에서 김씨는 각국에서 모인 다른 20여명의 스트링어와 함께 세계적인 선수들의 라켓 스트링을 책임졌다. 그의 손을 거친 라켓으로 알렉산더 즈베레프(23ㆍ5위ㆍ독일)와 시모나 할렙(28ㆍ8위ㆍ루마니아), 로베르토 바티스타 아굿(32ㆍ21위ㆍ스페인), 어네스트 굴비스(31ㆍ90위ㆍ라트비아) 등이 코트 위를 누볐다. 지난 11일 서울 압구정동의 한 빌딩 지하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에서 본보와 만난 김씨는 “나달은 생각보다 체격이 크지 않고 호리호리하고, 도미니크 팀은 화면이랑 똑같이 생겼다”라며 생생한 목격담을 전했다.
스트링어는 테니스를 모르는 대중에겐 생소한 직업이다. 테니스 라켓의 줄(string)을 바꿔 끼우는 일을 스트링잉(stringing)이라 하는데, 이를 업으로 삼는 사람을 스트링어라 부른다. 흔히 스트링잉은 줄만 끼우는 단순 작업으로 오해 받지만 실제론 섬세하고 복잡한 기술을 요한다. 사용자의 플레이스타일에 따라 스트링 종류부터 텐션(줄을 당기는 장력)값이 다른 데다, 스트링어의 작업 방기술과 매듭에 따라 스트링이 평행을 이루지 않거나 동일한 텐션이 아닌 경우 볼 컨트롤이 안 되기 십상이다.
실제로 이날 방문한 그의 작업실은 마치 수술실을 연상케 했다. 라켓을 고정하는 스트링 머신 위에 하얀 조명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손님이 맡긴 라켓 작업에 열중하던 김씨는 “이렇게 조명이 강해야 조금의 흠집이나 실수를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평범했던 테니스 동호인이 스트링어의 길을 걷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김씨는 학교 졸업 후 은행과 부동산 관련 회사에 다녔다. 평일엔 회사, 주말엔 코트로 출근하던 열혈 테니스 동호인이었다. 그러던 중 직접 스트링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김씨는 “보통 줄을 바꿔 끼러 동대문에 가는데 주말만 되면 사람이 많아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럼 직접 내 라켓을 작업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스트링에 입문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그 길로 김씨는 스트링 머신을 구매해 집에서 홀로 줄질을 하기 시작했다. 누구한테 배울 수 있는 일도 아닌 터라 처음엔 라켓 하나를 작업하는데 2시간이 넘게 소요됐다. 김씨는 “이제는 20분이면 하나를 끝내는데 그때는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김씨는 스트링을 매면 멜수록 좀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욕심이 생겼다고 고백했다. 막 신혼생활을 시작한 2004년 김씨는 우연히 양재동 테니스닥터의 김병수 대표를 만났다. 한국에서 줄 잘 매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처음에 스트링 매는 법 좀 가르쳐달라고 찾아갔더니 단번에 쫓아내셨다. 아무나 가르쳐줄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던 거다. 몇 번을 그렇게 퇴짜를 맞다가 진심으로 배우고 싶다는 내용의 손 편지를 드렸더니 감사하게도 결국엔 받아주셨다.”
그날로 주말마다 양재동으로 출근해 김 대표에게 스트링 매는 법을 배웠다. 머신도 바꾸고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2명의 자녀가 태어나 스트링 머신을 둘 공간이 없어지자 회사 사무실로 옮겨 작업을 계속했다. 주말 밤에는 사무실로 홀로 남아 줄질을 했다.
그러기를 10년, 스트링이란 업에 매력을 느낀 김씨는 2016년 전업 스트링어가 되기로 결심했다. “어느 순간 줄을 매는 데 마음이 너무 편안했다. 굳이 과장하면 도 닦는 느낌이랄까. 마음이 심란할 때 스트링을 매면 차분해지고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게 되더라. 어느 순간 그게 너무 좋았다.”
고민도 많았다. 금전적인 이유가 가장 컸다. 김씨는 “처음엔 줄을 매고 싶었던 것뿐인데, 현실은 장사였다. 옷이나 신발 같은 테니스 용품을 팔게 되면 손님 사이즈에 맞춰 꺼내주기도 하고 재고 관리도 해야 했다. 생각했던 ‘오직 줄 매는 일’과는 달랐다. 돈이 안 되더라도, 그래도 줄질만 하는 전문 스트링어를 한 번 해보고 싶었다”고 전했다.
그의 결심을 전하자 주변에선 다시 생각해보라는 반응뿐이었다. 김종욱씨를 가르쳤던 김병수 대표도 “잘 다니던 회사 그만 두고 가족 굶어 죽일 일 있냐”며 “이 짓 할 생각 절대 꿈꾸지 말라”고 그를 말렸다. 하지만 아내가 “이미 한참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한 번 해봐”라며 김씨의 도전을 응원했다. 결국 회사에 사표를 냈다. 김씨는 “회사 그만 둘 때 ‘미친놈’ 소리 들을까 봐 스트링어 한다는 말도 못 꺼냈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결심이 확고했기에 일은 척척 진행됐다. 월세 때문에 1층에 가게를 낼 생각은 꿈도 못 꿨다. 결국 지하의 작은 사무실을 구했다. 월세는 2년치를 한꺼번에 냈다. 망해도 반드시 2년은 채우겠다는 선언적인 의미였다. 김씨는 “여전히 벌이는 시원찮다. 그래도 처음 걱정했던 2년이 지나 3년째인데도 아직 줄을 매고 있어서 다행”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입소문을 타고 매일 20명이 넘는 손님이 김씨의 가게를 찾는다.
◇김천 챌린저에서 프랑스오픈까지, 새로운 스트링 문화를 만들다
그가 처음 대회 공식 스트링어로 참가한 것은 2016년 국제테니스연맹(ITF) 김천 챌린저였다. 김병수 대표를 따라 지원스태프로 대회에 참가한 적은 있었어도 스트링어로 나간 것은 김천 대회가 처음이었다.
보통 남자프로테니스(ATP)와 여자프로테니스(WTA), ITF 주관 대회는 경기장에 공식 스트링 부스를 마련한다. 선수들이 라켓을 부스에 맡기면 스트링어들은 밤새 작업해 줄질을 완료하는 방식이다. 스트링어들은 예선부터 참가하는 모든 선수들의 라켓을 손봐야 하기에 밤샘작업을 하기 일쑤다. 김씨는 굳은 살 가득한 손을 내밀며 “한 번 대회에 다녀오면 손이 얼얼하다”면서도 “한 경기 한 경기가 중요한 수많은 선수들 때문에 하나도 허투루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여러 대회를 참여하며 김종욱씨 마음에 걸렸던 건 스트링부스 운영 방식과 스트링어에 대한 낮은 인식이었다. 김씨가 국내 대회에서 목격했던 스트링부스 운영은 주먹구구식이었다. 김씨는 “외국에서는 스트링어가 전문적인 직업으로 여겨지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그런 인식이 부족하다. 선수들이 매점 아저씨 취급하는 게 싫었다”고 꼬집었다.
누가 지적한 것도 아니었지만 김씨는 운영 방식을 하나씩 바꾸기 시작했다. 그는 해외 대회에서 사용하는 방식을 참고했다. 쪽지에 볼펜으로 선수들의 요청 사항을 적는 방식에서 엑셀로 직접 프로그램을 만들어 라벨지에 프린트해 붙이는 방식으로 바꿨고, 라켓만 달랑 선수들에게 주던 것도 라벨지가 붙은 폴리백에 넣어서 주기 시작했다. 대회 운영데스크에 부탁해 스트링어가 현금을 받는 방식에서 대회 상금에서 제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선수들이 스트링어를 바라보는 눈도 변하기 시작했다.
김종욱씨는 이 방식을 자신의 가게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선수들처럼 어떤 스트링과 텐션이 맞는지 모르는 손님들에겐 각자의 스타일에 맞춰 스트링 작업을 해줬다. “손님의 플레이스타일을 알 수 없으니 보통 본인이 테니스 치는 영상을 찍어서 가지고 와달라고 부탁한다. 감아 치는지, 세워 치는지 영상이 가장 정확하다. 그걸 보고 최대한 좋은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스트링 작업을 한다.”
그러던 중 2018년 WTA 투어 서울오픈에서도 스트링 작업에 열중이던 김씨에게 대회 공식 스폰서였던 바볼랏의 관계자가 말을 걸어왔다. 이미 소문난 그의 스트링 실력과 열정을 눈 여겨 보고 내년 프랑스오픈의 공식 스트링어로 참가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미스터 킴, 베리 베리 뷰티풀”
올해 프랑스오픈은 김종욱씨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롤랑가로스 프랑스오픈의 공식 스폰서이기도한 바볼랏의 제의를 흔쾌히 수락한 김씨는 지난 5월 중순 파리로 향했다.
처음엔 한국인 스트링어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세계적인 선수들이 뛰는 그랜드슬램답게 내로라하는 스트링어들이 한 자리에 모인 만큼 스트링 작업에 대한 기준도 높았다. 김씨는 “유럽은 스트링어 바닥이 굉장히 좁다. 특히 프랑스오픈 같은 큰 대회는 실력이 검증된 사람만 데려간다. 20년 넘게 프랑스오픈에 참가한 분도 있을 정도로 경력도 화려했다. 게다가 한국인은 영어를 못해 의사소통이 안 된다는 인식이 강하니, 당연히 처음엔 못 미더웠을 거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스트링에 대한 고집이 스트링 장인들의 시선을 바꿨다. 전문 스트링어들도 촉박한 시간 안에 수십 자루의 라켓 작업을 마쳐야 하는 대회 일정상 스트링 기술을 모두 사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김씨는 그 와중에도 모든 라켓에 풀링(줄을 당겨 텐션을 좋게 만드는 기술) 작업을 수행했다. 그의 작업 방식을 지켜보던 다른 스트링어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김씨는 “70세가 넘은 일본인 스트링어 토로씨는 처음엔 저와 말도 안 섞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제가 작업한 라켓을 보더니 ‘미스터 킴, 베리 베리 뷰티풀’이라고 극찬을 하더라. 나중에는 따로 불러서 명함을 주고는 나중에 꼭 놀러 오라고 했다”는 일화도 전했다.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예선까지만 프랑스오픈에 참가할 계획이었지만 본선까지 계약을 연장해 예정보다 오래 파리에 머물렀다.
2주간의 긴 일정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김종욱씨는 다시 줄질에 매진하고 있다. 프랑스오픈 까지 정복했으니 스트링어로서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그는 웃으며 짧은 대답을 남겼다.
“처음부터 목표는 따로 없었다. 그냥 이게 좋아서 하는 거니까. 평생 조용히 줄질만 하면서 살고 싶다.”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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