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하게 유명해지지 않았던, 뛰어난 미국적 목소리”(보그), “그녀는 인생을 좋게 꾸미기에 너무 많은 것을 경험했다”(NPR), “그는 생전에 국보로 지정되었어야 마땅하다”(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노골적이고 웃기고 숨이 멎을 듯이 놀랍다”(뉴요커), “작가들의 작가”(마리끌레르).
2015년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낯선 작가의 이름이 등장했다. 유수 언론들도 서로 질세라 이 작가의 소설에 일제히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는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가 아니었다. 2004년 68세의 나이로 사망, 사후 11년 뒤에서야 새롭게 발견된 루시아 벌린의 얘기다. 당시 미국 출판계에 일약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던 벌린의 단편선 ‘청소부 매뉴얼’이 국내 출간됐다. 전 세계 31개국에 이미 번역됐고 한국에는 처음 소개되는 벌린의 작품이다.
표제작인 ‘청소부 매뉴얼’은 벌린의 화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단편이다. “42-피드몬트. 잭런던광장행 완행버스. 청소부들과 할머니들. 나는 한 눈먼 할머니 옆에 앉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실제 청소부로 일하던 벌린이 자신이 청소하는 집과 집주인들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벌린은 그들이 남긴 흔적에서 그들의 삶을 본다. 타인의 일상과 버릇, 취미와 수집품을 모두 들여다볼 수 있는 청소부라는 직업이 일반적 인식과 달리 그 어느 직업보다 가장 내밀하고 자유로운 일처럼 보일 정도다. “청소부들은 사실 물건을 훔친다. 하지만 우리를 고용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염려할 것들은 아니다. 결국 우리를 돌게 만드는 건 과잉 반응이다(…) 내가 실제로 훔치는 것은 수면제뿐이다” 처럼 직업에 대한 통념을 뒤집으며 쾌감을 전한다.
청소부뿐 아니라, 벌린의 소설에서는 그가 실제로 갖가지 일을 전전하며 마주친 풍경이 등장한다. 벌린은 1971년부터 1994년까지 미국 버클리와 오클랜드에서 고등학교 교사, 전화 교환수, 병동 사무원, 청소부, 내과 간호보조 등의 일을 하며 글을 썼다. 소설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또 다른 배경은 병원 응급실이다. ‘응급실 비망록 1977’ 등의 글에서 벌린은 응급실에서 일하며 목격하고 느낀 것들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그는 그곳에서 광범위한 관상동맥 혈전증 환자들, 페노바르비탈(마약 성분의 항경련제)을 복용하고 자살을 기도한 부인들, 수영장에 빠진 어린이들, 집시들의 죽음과, 술주정뱅이와 자살 미수자들을 본다. 생과 사가 교차하는 가장 극적인 공간에서 벌린은 때로는 초연한 기록자처럼, 때로는 당사자처럼 생생하게 써내려 간다.
청소부나 간호보조 등 직업적 부분뿐만 아니라 가난과 실업, 낙태와 알코올 중독 등 책에 실린 대부분은 벌린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다. 1936년 알래스카에서 태어난 벌린은 광산업을 했던 아버지를 따라 아이다호, 켄터키, 몬태나 등 미국 서부지역과 칠레의 광산 캠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통해 얻은 네 아들을 홀로 키웠다. 오랫동안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으며, 홀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탓에 주로 짧은 소설을 썼다. 이렇게 쓴 단편을 크고 작은 잡지에 발표하긴 했으나 생전 큰 주목은 받지 못했다. 말년에는 평생 시달리던 척추옆굽음증으로 인해 산소호흡기를 달고 살았으며, 2004년 68세 생일에 숨졌다.
벌린 자신이 실제로 겪은 일이 글의 배경과 소재가 되는 탓에, 소설은 산문과 픽션의 모호한 경계에서 쓰였다. 이야기의 완성도를 말하기 위해서는 결국 작가의 삶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뒤늦게야 발견된 천재’ ‘숨겨진 보석’ 같은 수식과 파란만장한 그의 이력이 소설에 신화적 분위기를 덧씌우기도 한다.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미국 서부와 멕시코 국경지역의 자유분방한 모습과, 육체노동자, 이동주택, 빨래방 등 보통 사람들의 삶을 세밀하게 담아낸 것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여기에 벌린 특유의 냉소적인 듯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문체 역시 매력을 더한다.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ㆍ공진호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발행ㆍ648쪽ㆍ1만 6,000원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