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다와 탕탕의 지금은 여행 중(111)] 이스파한에서 사아가세이예드까지
이란의 중부 이스파한에서 테헤란까지 달렸다. 곧장 가는 빠른 길 대신 북서부 작은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좁은 국도로 길을 잡았다. 번번이 처음 본 현지인의 집에서 눈을 붙이며, 알려지지 않은 이란의 심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풍경도 참 맛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새로웠다.
이란은 ‘모순’이란 단어에 가장 근접한 나라다. 여성이라면 반드시 히잡을 써야 하는 엄격한 이슬람 국가지만, 옷 가게의 안과 밖엔 민망할 정도로 섹시한 레이스 속옷을 척 하니 진열해 놓았다. 친절이라면 세계에서 첫째라 해도 모자랄 판이지만 핸들만 잡으면 양보란 없다. 현재의 억압적인 정치 체제와 페르시아인에게 흐르는 자유의 피가 불균형 속에서 균형을 이룬 형국이다.
이란에서 한 달을 소진한 우리에게 북서쪽 여행은 숙제로 남아 있었다. 버스를 이용하거나 (다소 쉬운) 히치하이크로는 원하는 소도시에, 게다가 당일 닿을 수 있을 지 장담할 수 없었다. 렌터카만이 답이었다. 이란의 렌터카 가격은 고객을 원하지 않는다는 듯, 현지 물가에 비해 지나치게 비쌌다. 숙소를 통해 가까스로 빌린 차는 구형 프라이드, 칠순을 넘긴 아버지가 20대에 구입한 첫 차도 프라이드였다. 고된 세월을 견딘 이 렌터카는 운전자석 창문이 열리지 않았다. 브레이크도 뜻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산 중턱에서 관 속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했다. 단언컨대, 이란에서 렌터카를 할 경우 반드시 미리 도로 주행을 해볼 것. 이란인을 믿지만, 차에 관한 한 절대 믿을 수 없다는 게 여행을 마치고 난 후의 결론이었다.
불량 렌터카 때문에 우리의 하루는 오후 5시에나 시작됐다. 첫 목적지는 이스파한에서 서쪽으로 정확히 수평 방향에 놓인 사아가세이예드(Sar Agha Seyyed)다. 방향은 직선이지만 도로는 산세에 순응하며 빙빙 둘러 오르고 내린다. 무려 240km 남짓한 산길이다. 사아가세이예드는 자그로스 산맥을 따라 계단식으로 터를 닦고 집을 지은 이들의 보금자리다. 누군가의 지붕은 누군가의 정원이요, 곧 마을의 길이다. 모든 집이 앞산을 바라보고 있다. 늘 같은 방향의 풍경을 보고 있는 이 마을엔 바흐티아리(Bakhtiari) 유목민이 살았다. 전기 외에 어떤 문명의 이기와도 결별한 곳이라 궁금증이 증폭했다.
이란인이 사용하는 파시(페르시아어)는 한글처럼 세상의 소리를 닮은 언어다. 덕분에 영어로 표기하면, 알파벳이 제멋대로다. 목적지인 사아가세이예드도 내비게이션에 따라 여러 가지 철자로 쓰이고 있었다. 어느 기기는 ‘Sar Agah Seyyed’로, 어떤 것은 ‘Sraqasyd’로 표기한다.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식인 이 영문 표기를 미처 알지 못했다. 게다가 데이터를 쓸 수 있는 휴대폰 유심(Usim)은 이미 죽었다. 이란의 유심은 보통 한 달이 유효기간으로, 이 기한을 넘기면 별도로 등록해야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다. 25유로가 넘는 가격을 선뜻 지불할 우리가 아니었다. 믿는 구석이라곤 오프라인 지도 앱 ‘맵스미(maps.me)’였다. 이 내비게이션은 애초 구글맵에서 찾았던 ‘Sar Agah Seyed’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가고 있다. 하지만,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막다른 길이라고 했어. 이 길의 끝일 거야.”
제법 마을 형태를 갖춘 첼헤드(Chelgerd)를 지나니, 설산 아래 금싸라기를 뿌린 세상이 펼쳐진다. 양치기의 종소리가 배경 음악처럼 리드미컬하다. 환희도 잠시, 어둠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에서나 피크닉(?)을 즐기는 이란인의 텐트가 도로 양쪽을 가득 메우기 시작한다. 셰이흐알리한(Sheikh Alikhan) 폭포 근처다. 더욱 속도를 냈다. 한기가 급히 몰려왔다.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시나리오는 산중에 갇히는 사고다. 차는 불길하게 비포장 도로를 향해 올랐다. 길은 상하좌우로 휘어져 안 쓰던 근육까지 털 작정을 한다. 도로인가, 트레킹 코스인가. 어둠 속에서 제대로 분별이 되지 않는다. 새하얗게 쌓인 눈덩이가 좌청룡이요,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우백호다.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들다. 진흙탕 대잔치인 도로는 차 바퀴를 기어코 잡아먹을 심산이었다. 돌아가야 했다. 현지인들이 캠핑하던 빛을 향해, 다시 폭포 근처로.
야외 취침에 미숙한 우리는 잘 곳을 찾았다. 아, 그 누구도 영어를 하지 못한다. 사실은 페르시아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우리가 더 문제였다. 여행자는 때론 배우가 된다. ‘잘 곳’을 찾는다며 코골이 소리까지 섞어 연기하니 한 꼬마가 천막을 가리킨다. 이렇게 유목민이 되는 건가. 땅은 평탄하지 않았다. 돌 투성이인 바닥에 조금이라도 뒤척거리면 허리가 부러질 것 같았다. 좀 더 찾아보자. 그나마 집의 형체를 갖춘 곳으로 몸을 옮기니, 반가운 한마디가 들렸다.
“잠자리를 찾는다고?”
이스파한에선 아무도 모른다고 했던 그 마을, 사아가세이예드. 주인 가족은 애초 목적지가 맞다며 낯선 방문객을 안심시켰다. 따뜻한 환대 속에 우리는 일시에 마을 주민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가족과 그들의 ‘참 많은’ 친구들이 빙 둘러 지켜보는 자리에서 방 안까지 배달된 케밥을 해치웠다. 오프라인 번역기와 그들의 얕은 영어로 서로의 지난 날을 바삐 나눴다. 3평 남짓한 이 공간은 가족의 사촌의 사촌까지 함께 자는 방이다. 한 이불을 덮었다. 내일은 닿을 수 없었던 그곳으로 갈 수 있을까. 무엇보다 오늘은 깊은 잠이 필요했다.
강미승 여행 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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