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달라붙을 만큼 얇고 유연하지만 총알을 맞아도 끄떡없는 배트맨 슈트, 손목에 두르고 다니는 투명한 PC, 꼬깃꼬깃 접어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개인용 TV…. 컴퓨터그래픽(CG) 기술을 잔뜩 활용한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미래 기술들인 것 같지만, 아예 근거 없는 상상은 아니다. 현재까지 인류가 찾아낸 자연 물질 중 가장 가볍고 얇지만 강한, ‘꿈의 신소재’ 그래핀(Graphene)만 있다면 말이다.
2010년 10월,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2004년 그래핀 분리에 성공한 공로로 영국 맨체스터대 안드레 가임 교수와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박사를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특히 노보셀로프 박사는 당시 겨우 36세에 불과해 역대 두 번째로 어린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에 이름을 올렸다. 보통 연구성과가 실생활에 응용된 이후에야 느지막이 수상해 ‘장수해야 받을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노벨 물리학상이 이제 겨우 활용 가능성을 확인한 물질에 서둘러 주어진 셈이다. 대체 그래핀이 어떤 물질이기에, 단지 가능성만으로 세계 최고 권위의 과학 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셀로판 테이프가 발견한 꿈의 물질, 그래핀
연필심으로 주로 사용되는 흑연은 탄소 원자들이 육각형 벌집 모양으로 결합돼 있는 평면이 지층처럼 겹겹이 쌓여 있는 형태다. 여기서 흑연을 이루는 탄소 결정층 한 겹을 그래핀이라 일컫는다. 그래핀이라는 이름은 흑연을 뜻하는 ‘그래파이트(Graphite)’에 탄수화합물을 뜻하는 접미사 ‘ene’을 붙여 만들어졌다. 이론적으로는 1947년부터 그래핀이 연구돼왔지만, 실제로 그래핀 한 장만 분리해내거나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개념으로만 존재해왔다.
2004년 가임 교수와 노보셀로프 박사는 놀라운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이들이 어느 날 ‘세상에서 가장 얇은 물질을 만들어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셀로판 테이프에 흑연 가루를 묻힌 뒤 이를 수백 번 가량 접었다 떼는 방식으로 점차 층을 벗겨내 봤는데, 테이프에 단일 원자 두께의 그래핀이 분리돼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핀의 존재가 최초로 증명된 순간이었다.
이른바 ‘셀로판 테이프 박리법’은 그간 수많은 과학자들이 각종 복잡한 화학적ㆍ물리적 방식을 총동원해도 10~50층짜리 흑연 결정을 만드는 데 그쳤던 것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간단한 방법이었지만, 동시에 질 좋은 그래핀을 만드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원래부터 흑연을 깨끗하게 닦는 수단으로 셀로판 테이프를 사용하는 것은 과학자들에게 일상 같은 일이었기에, 이 논문이 발표된 직후 그래핀을 연구하던 학자들은 일제히 탄식을 내뱉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그래핀은 과학자들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특성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핀은 지구에서 가장 강도가 센 물질로 알려진 다이아몬드만큼의 강도를 지니면서, 동시에 현존 소재 중 가장 얇은 0.2나노미터(1㎚=10억분의 1m) 두께밖에 되지 않는다. 벌집 모양으로 형성돼 있어 충격에도 강하며, 면적의 20%를 비틀어도 될 정도로 신축성이 뛰어나다. 상온에서 구리보다 100배 많은 전류를 실리콘보다 100배 이상 빠르게 흘러가게 하며, 열전도성은 금속인 구리의 13배에 달한다. 무엇보다 빛의 98%를 통과시킬 정도로 투명하다.
이토록 완벽에 가까운 특성을 지닌 그래핀이 활용될 수 있는 방식은 무궁무진하다. 가장 대표적인 ‘꿈의 기술’은 휘거나 접을 수 있는 투명 터치스크린이나, 실리콘 반도체에 비해 100배 이상 성능이 좋아지는 그래핀 반도체, 태양전지판 등이다. 방탄ㆍ방열 등 특수 기능이 들어간 옷도 그래핀을 사용해 만들면 현재에 비해 훨씬 가벼우면서도 성능이 좋아져 우주복에까지 활용될 수 있다. 저명한 학자들마저 미래 활용도를 미처 다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그래핀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줄 수 있는 중요한 물질로 순식간에 자리매김했다.
◇국내 연구진이 이끌어가는 그래핀 상용화
2004년 발견 이후 당장이라도 세상을 바꿀 것 같았던 그래핀은 그러나 아직까지 상용화로 이어진 사례가 많지 않다. 순도가 높은 그래핀을 저렴한 가격에 대량생산하는 것이 만만치 않은 과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일단 가임 교수 등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셀로판 테이프로 흑연을 분리해내는 ‘기계적 박리법’은 이물질이 섞이지 않으면서 전기전도도도 높은 그래핀을 얻을 수 있지만, 상업화하기에는 여러 모로 한계가 분명하다. 크기와 형태를 원하는 대로 제어하기 힘들뿐 아니라 대량생산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최근 그래핀 제조에 주목 받는 방식은 국내 연구진들이 많이 택하는 ‘화학증착법’과 미국 벤처기업들이 사용하고 있는 ‘화학적 박리법’이다. 화학증착법은 탄소를 잘 흡착하는 촉매를 활용해 탄소 분자들을 그래핀 구조로 만들어내는 ‘바텀업(bottom-up)’방식이다. 화학적 박리법은 흑연을 산화(산소를 결합하는 반응)시킨 뒤 물을 넣어 분리해낸 다음 다시 환원(산소를 제거하는 반응)시켜 그래핀을 제조하는 ‘톱다운(top-down)’ 방식이다. 그러나 두 방식 모두 순수한 그래핀의 성질을 모두 띠는 질 좋은 그래핀을 만들기 어려워 상용화에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 길지는 않지만, 덕분에 그래핀 연구 분야에서는 ‘한류’가 거세다. 그래핀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 주요 후보로까지 거론됐던 김필립 미국 하버드대 물리학과 교수를 비롯해 그의 제자 홍병희 서울대 화학과 교수도 논문 피인용 수(다른 논문에서 참고하는 횟수)가 3,000회를 훌쩍 넘어서며 이 분야 권위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논문 피인용 수 3,000회는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는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이효영 성균관대 화학과 교수는 2011년 처음으로 상온에서 그래핀을 대량생산해낼 수 있는 기술을 발표해 주목 받기도 했다. 국내 업계에서는 차세대 디바이스를 연구하고 있는 삼성전자 등 전자업체들이 그래핀 연구를 이끌어나가고 있다.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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