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고성군 토성면 도학초등학교 부근엔 16m 높이의 거대한 조형물이 서 있다. 정식 명칭은 ‘무릉도원권역활성화센터’. 이 일대에서 장독을 만들어 팔던 지역민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 겸 건축물로, 국비와 지방비 14억5,000만원이 투입됐다. 당초 회의실이나 카페, 영화관으로 활용할 계획이었으나 2012년 완공과 동시에 사실상 폐쇄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센터를 수익사업에 활용하려면 지역 건립위원회가 건축비의 20%를 투자해야 하는데 재원 마련에 실패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7년이 흘렀다. 인적 드문 허허벌판이라 홍보 효과마저 기대하기 어렵다. 고성군 관계자는 “개발사업 시행 10년이 지나면 용도변경이 가능해 카페나 식당 등을 열 수 있고, 인근 도원 유원지를 잇는 도로를 정비하면 방문객이 증가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무릉도원을 꿈꿨으나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만 공공조형물이 전국에 넘쳐 나고 있다. 국민권익위원회에 따르면 6월 기준 전국의 공공조형물은 총 6,287점. 파악조차 못한 3분의 1가량의 지자체 현황은 제외된 숫자다. 권익위가 2014년 주민의견 수렴, 심의 기준 마련 등을 골자로 한 ‘지방자치단체 공공조형물 건립 및 관리체계 개선 방안’을 전국 243개 지자체에 권고했으나 절반이 넘는 146곳이 이행하지 않고 있다. 한국일보 ‘뷰엔(View&)’팀이 최근 다양한 이유로 논란이 된 공공조형물을 직접 찾아가 실태를 살펴봤다.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정체성도 모호
경북 군위군은 특산물인 대추를 앞세워 지역 발전을 꾀한다는 취지로 2016년 의흥면 수서리에 ‘어슬렁대추정원’을 조성하고 정원 한가운데에 대추 조형물을 설치했다. 6억9,500만원을 들인 조형물의 정체는 화장실. 그러나 현장에서 지켜보니 조형물로서도, 화장실로서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면 소재지에서 2.5㎞나 떨어진 한적한 도로변에 위치해 이용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7억짜리 화장실’이라는 비난을 의식해서인지 화장실 위치 안내표지 하나 설치하지 않았다. 군위군 관계자는 “원래 조형물로 추진하다 화장실로 변경되면서 사업비가 늘어난 것”이라며 “화장실 안내표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강원 인제군 살구미대교 아래 소양강 둔치에 설치된 메릴린 먼로상 역시 생뚱맞기는 마찬가지다. 접근성 떨어지는 황량한 장소도 문제지만 인제군과 미국 유명 여배우와의 연관성 또한 의아스럽다. 2017년 원주지방국토관리청이 5,500만원을 들여 조형물을 세우며 밝힌 연관성은 먼로가 6ㆍ25전쟁 직후 이 지역을 찾아 미군 위문공연을 했다는 기록뿐이다.
전북 고창군 람사르고창갯벌센터의 주꾸미 미끄럼틀도 정체성이 모호하다. 주꾸미가 지역 특산물이라고는 하나 실제와 달리 노란색인 데다 미끄럼틀 하나에 5억2,900만원이 들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지역 여론이 들끓었다.
◇혐오감에 흉물 논란까지
“악한 기운이 느껴져 무섭다. 밤에는 아치(몸통)에 빨간색 조명이 들어와 더 기분이 나쁘다. 없어졌으면 좋겠다.” 20일 전북 김제시 문화체육공원에서 주민 오성자(41)씨가 ‘백룡’ 조형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내문엔 “벽골제 쌍용놀이 전설을 모티브로 백룡의 선한 이미지를 표현했다”고 적혀 있지만 혐오스럽다는 여론이 일었다. 김제시가 지난달 여론조사를 통해 존치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는데, 곧바로 철거 서명운동이 시작됐다. 백룡 제작엔 7,800만원이 투입됐다.
2015년 6억5,300만원을 들여 제작한 경북 고령의 말 머리상도 혐오 논란에 휩싸였다. ‘왕국의 혼’이라는 이 작품이 대가야읍내 교차로에 등장하자 일부 주민들 사이에서 흉물스럽다는 민원이 제기됐고 결국 대가야농촌체험특구로 옮겨졌다. 고령군 관계자는 “공모로 선정한 디자인인데 설치 후에야 주민 정서와 괴리가 있음을 파악했다”면서 “국비 지원이라 주민 의견수렴은 따로 거치지 않았다”고 밝혔다.
세종시 소방청 청사 앞의 ‘흥겨운 우리 가락’은 생김새가 저승사자를 떠올리게 하고 재난을 관리하는 소방청 이미지와도 맞지 않으니 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정부청사관리본부는 “복합편의시설 공사 완료 시점과 연계해 이전 방안을 검토 중이나 비용이 만만치 않고 부지 내 마땅한 장소를 찾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밝혔다.
◇세월가면 잊혀지고 관리도 부실
세월이 지나면서 잊히거나 관리의 손길이 닿지 않는 조형물도 적지 않다. 충북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삼거리 부근에 서 있는 호돌이상은 88올림픽 성화봉송을 기념하기 위해 중원군이 1989년 세운 기념비다. 그러나 기념비 설립 5년 만에 중원군은 충주시로 편입됐고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현재 시는 기념비의 존재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1991년 고성 세계잼버리대회 기념 조형물도 강원 속초 해맞이공원에서 설명 문구 하나 없이 잊히고 있다. 비바람에 훼손된 채 서울 마포구 상암동 도로변에 서 있는 ‘월드볼2002’의 모습에선 17년 전 월드컵 4강의 영광보다 난립해 온 공공조형물의 어두운 미래가 더 또렷이 보인다.
홍경한 미술평론가는 “공공에 노출되는 조형물은 다수가 공감하는 보편적 가치를 반영해야 하는데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며 “이는 시각적 공해, 폭력 행위나 다름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또 “제작 전후 주민 의견과 평가를 반영하고 지자체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기구에서 투명하게 공모 심사를 진행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윤소정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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