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권에서 ‘The Troubles’이라는 단어는 북아일랜드 분쟁, 즉 1960년대 말부터 90년대 말까지 북아일랜드 독립을 요구해온 소수파 가톨릭 북아일랜드 공화국군(IRA)과 영국의 유혈 대립을 통칭한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무장세력인 IRA과 이를 저지하려는 무장세력(UDA)간의 테러와 보복, 납치와 살인이 30년에 걸쳐서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북아일랜드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지방에서는 한 해 평균 100여명, 총 3,500여명이 숨지고 4만7,500명 이상이 부상 당했다.
지난해 맨부커상 수상작인 애나번스의 장편소설 ‘밀크맨’은 두 세력간의 무장 다툼이 한창이던 1970년대 북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한다. 소설에서 영국과 북아일랜드, IRA와 UDA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영국은 ‘물 건너’로, 아일랜드는 ‘국경 건너’로, 같은 도시 내 친영국 지역은 ‘길 건너’와 ‘길 저쪽’으로, 주인공이 사는 친아일랜드 지역은 ‘길 이쪽’으로 불릴 뿐이다. 장소뿐 아니라 소설의 모든 인물들은 이름 대신 ‘가운데딸’ ‘어쩌면 남자친구’ 등으로 지칭된다.
‘밀크맨’(우유배달부) 역시 마찬가지다. 밀크맨으로 불리지만 진짜 우유를 배달하지는 않는 이 남자는, 마흔한 살의 유부남이자 무장독립투쟁 조직의 주요 인사로 지역 사회에서는 명망이 두터운 인물이다. ‘길 이쪽’과 ‘길 저쪽’의 대립이 격화된 상황에서 저항군의 핵심 간부인 밀크맨의 마을 공동체 내 존재감은 절대적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 밀크맨이 걸어가면서 책 읽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열여덟 살 소녀인 주인공의 주위를 맴돈다. 신체접촉을 시도하거나 음란한 말을 하는 노골적인 성희롱은 아니지만 어느 날 불쑥 나타나 말을 걸거나, 자신의 차에 탈 것을 종용하며 주인공을 압박해온다.
몸에 손 하나 대지 않고도 충분하게 성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일상이 천천히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실제로 물리적, 육체적 폭력이 난무하는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정치적 문제가 팽배한 상황”에서 ‘그런 일’ 따위는 중요하게 취급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인공을 ‘피해자’가 아닌 “빠르고 멋지고 환상적으로 짜릿한 반란군”의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고 호도하기까지 한다. 주인공의 지속적인 호소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이렇게 되받아친다. “네가 자초한 거야. 그 습관 고치라고 말했는데. 길에서 걸으면서 책 읽는 거 말야.”
소설은 존엄하고자 하는 한 개인의 의지가 유, 무형의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무력화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성폭력 고발보다는 꽃뱀, 불륜, 의심, 소문이 더 손쉽게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독립투사인 남성’과 ‘결함 있는 소녀’간의 진실 싸움은 애초부터 가능할 수 없다. 어쩌면 지금껏 이런 불공정한 토대 위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는 묵살하고 가해자의 목소리만 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작가는 500페이지에 걸쳐 혼란스럽게 이어지는 주인공의 입말을 통해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20년간 단 두 편의 장편과 한편의 중편만을 발표한 무명 작가였던 애나 번스는 지난해 북아일랜드 최초로 맨부커상을 수상함으로써 단숨에 자신의 목소리를 세계에 알렸다. 맨부커상 시상식에서 번스는 이 소설이 벨파스트(북아일랜드의 수도)에서 보낸 유년 시절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고 밝혔다. 오랫동안 묵살됐던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지금 전세계 문학의 시대적 흐름이다. 지난 15일 발표된 올해 맨부커상은 페미니즘 문제의식을 다룬 마거릿 애트우드의 ‘증거들’과 베르나딘 에바리스토의 ‘소녀, 여성, 다른 사람’에 돌아갔다. 10일 발표된 2018 노벨 문학상 역시 여성의 목소리 복원에 힘쓴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에게 돌아갔다. 인종, 국적, 세대, 지위를 불문하고 오랫동안 억압돼 있던 여성들의 목소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발굴되고, 이어질 것이다. 억압돼 있던 시간만큼이나 길게.
밀크맨
애나번스 지음ㆍ홍한별 옮김
창비 발행ㆍ500쪽ㆍ1만6,800원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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