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EAS 3년째 아세안+3 은 2년째 불참… 파리기후협약 탈퇴
中 주도 ‘RCEP’ 합의 타결도… 美, 글로벌 리더십 약화 자초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이 갈수록 국제 무대에서 발을 빼고 있다. 지구촌의 공동 이슈 대응을 위해 전 세계가 맺은 합의를 일방적으로 깨는가 하면, 특별한 이유도 없이 ‘정상들 간 만남’의 자리에 불참하는 등 상대국을 무시하는 태도를 거리낌 없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수행하기보다는 미국의 이익만을 좇는 ‘신(新)고립주의(또는 미국우선주의)’ 외교 노선을 표방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빚어진 현상이다. 미국이 스스로 자국의 글로벌 리더십 약화를 자초하고 있는 가운데, 어쩌면 앞으로 ‘미국 없는 세계’에서 형성될 국제 질서가 뉴 노멀(New Normalㆍ새로운 기준)이 될 것이라는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가장 단적인 사례는 4일(현지시간) 트럼프 행정부가 끝내 강행한 파리기후변화협약(이하 파리협약) 탈퇴다.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이날 성명을 내고 “미국은 오늘 파리협약 탈퇴를 위한 프로세스를 시작했다”라며 “협약 규정에 따라, 유엔에 공식 탈퇴 통보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지난 2017년 6월 트럼프 대통령이 파리협약 이탈 의사를 공식화한 지 2년 4개월 만이지만, 사실 이날은 ‘탈퇴 의사 통보는 협약 발효 3년 후부터 가능하다’고 정한 규정상 실제로 탈퇴 절차를 밟을 수 있는 첫날이었다. 이날만을 학수고대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다만 탈퇴의 효력은 통보로부터 1년 후인 내년 11월 4일, 다시 말해 차기 미 대선 다음날부터 발생한다.
파리협약은 지구온난화 문제 대응을 위해 각 나라가 목표치만큼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감축하자는 내용으로, 2015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195개국에 의해 채택돼 이듬해 11월 4일 발효됐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과학적 근거도 없이 “파리협약은 사기”라고 몰아붙였고, 취임한 지 약 4개월여 만에 탈퇴 방침을 공개 선언했다. 유럽연합(EU) 등 세계 각국의 비판 내지 만류는 물론, “기후변화는 실제 현실”이라는 미 연방기관의 보고서 제출까지 잇따랐으나 그는 오로지 “미국 경제가 큰 피해를 본다”는 이유만을 들어 탈퇴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자국의 경제적 이익, 다시 말해 ‘돈’ 앞에서는 국가 간 약속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트럼프 행정부의 고립주의가 이날 정점을 찍은 셈이다. 심지어 미국은 중국에 이어 탄소 배출량이 두 번째로 많은 ‘온난화의 주범’이다.
이날 태국 방콕에서는 ‘타국에 대한 존중 결여’나 다름없는 트럼프 정부의 이 같은 태도가 역풍을 맞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아세안+3(한ㆍ중ㆍ일) 정상회의 및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 미국 측 대표로 참석한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트럼프 대통령 친서를 대독하는 자리에서 아세안 국가들이 사실상 ‘미국과의 회담 보이콧’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아세안 10개국 중 이날 정상이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낸 국가는 주최국인 태국(쁘라윳 짠오차 총리)과 베트남(응우옌쑤언푹 총리), 라오스(통룬 시술릿 총리) 등 3곳에 불과했다. 나머지 7개국은 외교장관 등 관료들을 대신 보냈다. 미국이 소집한 이날 회의의 ‘급’을 아세안 국가들이 낮춰 버린 것이다.
아세안의 이러한 ‘집단 항의’는 트럼프 대통령이 EAS에는 3년 연속, 아세안+3에는 2년 연속 각각 불참한 데에서 비롯됐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른바 미국의 ‘동남아 홀대’가 낳은 결과라는 얘기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브라이언 보좌관을 통해 “내년 1분기에 10개국 정상 여러분을 백악관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제안을 했지만, 어쨌든 아세안 국가들한테 푸대접을 받으며 체면을 구긴 셈이 됐다. 특히 이번 회의에서 중국이 미국 견제를 위해 추진해 온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협정문이 타결된 것과 관련, 아세안 국가들로선 ‘미국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보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트럼프 정부의 고립주의 외교가 현실화한 건 처음이 아니다. 출범 직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탈퇴했고, 지난 2018년 5월에는 이란 핵합의(JCPOAㆍ포괄적공동행동계획) 파기 선언을 해 큰 파장을 낳았다. 지난달 10월 중순에도 동맹국들과의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시리아 주둔 미군 철수를 결정, “동맹마저 무시한다”는 비판에 휩싸였다. 미군 철수 이유도 ‘막대한 비용’ 때문이라고 트럼프 대통령은 스스럼없이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의 모든 결정 배후에는 돈이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이러한 고립주의 노선이 ‘경제적 이익’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나온다. 예컨대 고립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보호무역주의는 ‘반짝 효과’만을 낳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AP통신은 이날 “작년 3월 트럼프의 수입 철강에 대한 25% 관세부과는 미 철강산업을 되살리려는 조치였지만, 그 효과는 1년도 가지 않았다”고 전했다. 지난해엔 미국 내 철강 산업 일자리가 늘었으나, 올해 들어선 미 주요 철강업체 순익이 반 토막으로 줄고 공장 가동률도 지난 7월과 8월 목표치인 80%에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됐다는 지적이다.
미국이 국제 무대에서의 신뢰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음에 따라, 세계도 그 대비를 위해 분주한 모습이다. NYT는 파리협약 탈퇴와 관련, “기후변화 문제 외교관들은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인 미국의 협력 없이 앞날을 모색해야 한다”며 “전 세계의 외교 전략 전환이 이미 시작됐다”고 전했다. 실제로 중국은 파리협약에 대한 변함 없는 준수를 다짐하고, 아세안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등 미국이 비운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고명현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트럼프의 ‘일방주의’는 오랫동안 유지돼 온 자기파괴적 행동”이라며 “그로 인해 미국의 동맹 체제가 이완될 경우, 중국이 동아시아나 대만 문제, 대(對)아세안 외교 등에 있어서 영향력을 키우고 득을 보게 되는 건 분명하다”고 진단했다.
게다가 내년 미 대선 이후에도 미국의 고립주의는 계속될 공산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 더욱 노골화할 게 뻔한 데다, 미 민주당의 유력 대선 주자인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이 최근 ‘중동 지역 미군 철군’ 입장을 밝혔다는 점에 비춰 볼 때 정권 교체가 있다 해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현 기조는 유지될 것이라는 얘기다.
김정우 기자 wookim@hankookilbo.com
조영빈 기자 peoplepeople@hankookilbo.com
방콕=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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