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첫 무대가 2010년이었으니 벌써 10년째다. 그 정도 공연했으면 약발(?)이 떨어질 법도 한데, 올해 공연에도 남경주 최정원 이지하 송일국처럼 무대에서 이름 깨나 떨친다는 유명 배우들이 줄줄이 출연했다 한다. 이 정도면 작품 자체가 지닌 힘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연극 ‘대학살의 신’ 얘기다.
이 무시무시한 제목의 연극은 2009년 처음 무대에 올랐다. 프랑스 극작가 작품인데, 진보좌파의 위선을 까발리는 통렬한 풍자로 큰 화제를 모았다. 프랑스에 살다 간간히 한국에 들어오는 진보좌파 분들은 프랑스에 빗대 한국의 근본적인 촌스러움을 힐난하기 일쑤인데, 정작 그 프랑스 사람들 눈에도 진보좌파란 위선적이고 가식적이었던 모양이다.
진한 블랙 코미디 덕에 ‘대학살의 신’은 2009년 초연 때 이미 연극계 최고의 상이라 불리는 토니상에서 최우수작품상 등 3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 연출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이었던, 그 폼 나던 시절의 미국 땅에서도 진보좌파가 위선적이고 가식적이긴 매한가지였던지 조디 포스터와 케이트 윈슬렛 같은 쟁쟁한 여배우들이 주연을 맡았다.
연극 줄거리는 단순하다. 아이들끼리 치고 박는 싸움을 벌였던 일을 계기로 우이에-베로니카 부부와 레이-아네트 부부가 만난다. 교양 있는 중산층 일원답게 합리적이고 우아한 방식으로 사건을 종결 지으려 들지만 자꾸 핀트가 어긋나고, 그러다 마침내 그간 내뱉은 온갖 멋진 말들이 무색해지게 머리 끄댕이를 잡고 육탄전을 벌이고야 만다. 말 그대로 애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완벽한 타인’과 비교해봐도 좋다. 중산층의 상징이랄 수 있는 ‘과시적 거실’ 혹은 ‘과시적 식탁’이 어떻게 엉망진창으로 망가져가는지 한 눈에 드러내는 작품이긴 마찬가지니까.
2009년 화제가 되자 연극은 그 이듬해 한국에 들어왔다. 이 작품 한국 초연 당시 기억을 끄집어내는 건, 프랑스 연극이니 프랑스풍으로 한번 꼬아 말하자면 ‘번역 불가능성’ 때문이다. 당시 대학로 최대 관심사는 대체 이 작품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였다.
가령 베로니카는 남들에게 남편이 리버럴 좌파로 비춰지길 원하면서 남편의 말 하나, 행동 하나 일일이 단속하려 든다. 문화적 취향을 과시하기 위해 상대 부부를 불러놓고서는 50만원이나 들여 화려한 꽃으로 집을 장식한다. 그리고 애들 싸움을 중재하는 판국에 무슨 연유에선지 수단의 다르푸르 학살에 대해 깊은 공감과 인류애적 연대를 보여준다.
부르주아 중산층의 위선을 보여주는 이런 장치들을 어떻게 풀어내야 한국 배우 입에 착 붙고, 한국 관객 귀에 착 감길까. 이 까다로웠던 ‘번역 불가능성’ 문제는 단순히 이국적인 배경이나 상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우리가 제 아무리 부르주아 중산층의 위선을 비웃어대는데 능수능란해졌다지만, 그 위선에도 수준 차이가 있어 프랑스식 위선까지는 감히 꿈도 꿔보지 못해서일까.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 수사 이후 ‘진보의 위선’을 두고 말이 많다. 조 전 장관 일가를 옹호하고픈 생각은 없지만, 다만 반문 하나는 제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건 그저 모두 제 욕망 하나에 충실하게 사는 것뿐인가.
존재 자체가 모순투성이인 우리가, 그런 황폐함을 견뎌내 정치적으로 고양되기 위해서라면 그래도 위선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김영민 서울대 교수가 ‘과학이 만드는 민주주의’(이음 발행) 저자들 발언을 인용해 썼듯(본보 11월 4일자 2면 '열망이 정체성이다'), 우리 모두는 창자에 약간의 똥이 있는 존재임에도 ‘형성적 열망’이 있기에 마침내 자연상태를 넘어 정치공동체로 향해 나아간다. 유발 하라리가 간명하게 정리했던가. 사피엔스가 지구의 지배자가 된 건, 허구를 만들어내는 능력 때문이라고. 위선, 허구, 열망은 지금과는 다른 정치적 공동체에 대한 꿈일 것이다. 다른 꿈은 계속 꿀 필요가 있다.
조태성 사회부 차장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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