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자박 소읍탐방]<46>창원 마산합포구 진동면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라는 책이 있다. 1803년 조선 후기 문인 김려가 53종의 바다 생물의 특징을 나열한 저술이다. 정약전의 ‘자산어보’보다 11년 빠른 국내 최초의 어보다. 여기서 우해는 진해의 다른 이름이다. 마산합포구 진동면 고현리 포구에 이 책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흔히 아는 진해(창원시 진해구)와는 30km가량 떨어진 곳이다.
◇‘진짜 진해’는 진동면이었다
작은 포구를 낀 아담한 마을이겠거니 여겼는데 틀렸다. 막상 진동면 소재지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고층 아파트다. 한 구역에 밀집된 것도 아니어서 다소 어지럽다. 이런 아파트 단지 사이사이에 진동의 진면목이 숨어 있다.
차량이 드나들기 힘든 좁은 옛 골목 안쪽에 삼진중학교가 있다. 삼진은 진동면과 이웃한 진북ㆍ진전면을 포괄하는 명칭이다. 진동이 이 지역의 중심이라는 의미다. 삼진중학교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진해현 관아 터가 있다. 읍성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고 그 안에 동헌과 객사, 두 채의 건물을 복원해 놓았다.
진해현 관아는 1832년(순조32) 이영모 현감이 세웠다. 조선 후기에 건립된 관아로는 드물게 동헌뿐만 아니라 형방소, 사령청, 삼문, 객사, 마방 등 부속 건물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 면사무소와 삼진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옛 모습을 잃고 말았다. 현재 중학교 옆 자투리 터에 복원한 건물에서 고을의 중심지였다는 자부심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주변에 읍성의 일부로 추정되는 돌담이 남아 있고, 객사 건물 뒤에 수령 400년 된 푸조나무 한 그루가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어 ‘진해현 관아’의 옛 풍모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진해 관아가 이곳에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간단하다. 이곳이 실제 진해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한일강제병합 직후인 1912년 옛 웅천군 일대에 군항을 건설한 후 ‘바다를 제압한다’는 의미로 ‘진해’라는 명칭을 붙였다. 진동면 일대는 이때부터 새 진해와 구분해 ‘삼진’으로 불리게 된다.
관아에서 약 1km 떨어진 마산향교에도 진해의 흔적이 남아 있다. 향교 뜰에 ‘진해향교 공자 위패 매안지’ 비석이 서 있다. 1909년 3월 진해향교를 폐쇄하면서 대성전에 봉안해 오던 공자와 유교 22현(賢)의 위패를 묻은 곳을 표시한 비석이다. 새로운 진해가 자리 잡으려면 옛 진해의 흔적을 지워야 하는데, 1414년부터 내려온 ‘진해향교’라는 명칭이 큰 걸림돌이었던 모양이다. 매안지 비석은 진해향교뿐만 아니라 진짜 진해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과정을 알려주는 증거인 셈이다.
문을 닫았던 진해향교는 1993년 창원군향교라는 명칭으로 복원됐고, 1995년부터는 마산향교라는 이름으로 유지되고 있다. 비교적 최근에 건립한 향교여서 명륜당 마루는 유리창으로 마감돼 있고, 대성전을 제외하면 부속 건물이 대부분 현대식인 점이 이채롭다.
◇청동기 유적과 공룡 놀이터
진동면이 창원의 알짜배기 고을이라는 증거는 또 있다. 진해현 관아 터 앞 ‘진동리유적’은 어물쩍 빼앗겨 버린 진해라는 지명보다 훨씬 오래된 문명의 흔적이다.
진동리유적은 2002년 토지구획 정리사업 과정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이전의 청동기 유적이다. 발굴ㆍ조사를 거쳐 2006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됐고, 논밭이었던 유적지를 지금처럼 정비한 것은 2014년이었다.
길이 500m, 폭 150~200m의 진동리유적에는 대형 고인돌과 석관묘 41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이곳 고인돌은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모양부터 확실히 다르다. 동쪽 입구의 거대한 타원형 무덤이 가장 상징적이다. 직경 20m에 달하는 돌무지가 언뜻 설치미술처럼 보이는데, 이 역시 고인돌 무덤이다. 땅바닥에 큰 솥뚜껑을 덮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유려한 거북의 등 모습도 연상된다. 두 개의 굄돌 위에 평평한 바위를 올린 탁자형 고인돌만 상상했던 터라 파격이다. 잘 꿰어 맞춘 돌무덤 내부는 잔자갈로 1차 봉분을 만들고 흑갈색 점토를 쌓은 형식이라고 한다.
유적지에는 이외에도 네모로 축대를 쌓아 경계를 지은 사각형 무덤과 굄돌의 다리가 짧은 바둑판 모양의 고인돌 등 다양한 형식의 청동기시대 무덤이 흩어져 있다. 유적지는 주민들의 휴식 공간이기도 한데, 땅과 가까운 낮은 고인돌 무덤 끝으로 고층 아파트가 보인다. 자칫 콘크리트 숲에 영원히 묻힐 뻔한 유적이라 더욱 소중하다.
바닷가로 나가면 문명 이전의 공룡시대 흔적도 발견된다. 고현 어촌체험마을 방파제 끝에서 몇 발짝 내디디면 검은 화산 퇴적층 바위에 선명하게 찍힌 수십 개의 공룡 발자국이 보인다. 10여마리의 공룡이 이동한 흔적이다. 발자국 방향을 보면 바다에서 뭍으로 갓 올라오는 듯도 하고, 해변에서 한가하게 노니는 모습도 연상된다. 평화로운 공룡 놀이터가 그려진다. 그러나 실제는 초식공룡이 육식공룡에 쫓기어 달아나는 상황이라고 하니, 공룡시대도 상상하는 것만큼 평화로웠던 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공룡 발자국 주변은 시루떡보다 얇고 섬세한 암반 퇴적층이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05호로 지정돼 있지만 변변한 안내판조차 없다. 수수께끼를 가득 품은 진동의 보물이 잊히는 것 같아 조금은 아쉽다.
◇지금까지 먹은 게 미더덕이 아니라고?
진동면의 오래된 유적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바다의 더덕에 비유되는 미더덕만큼은 다르다. 전국 미더덕의 70~80%가 진동면 앞바다에서 생산된다.
미더덕 양식은 의외로 간단하다. 산란기를 앞두고 부표를 매단 그물(줄)을 바다에 드리우면 끝이다. 굴 양식처럼 종패를 뿌리거나 물고기처럼 먹이를 주지 않아도, 매달아 놓은 줄에 미더덕이 붙어 저절로 자란다. 어민들은 서식 온도를 맞추기 위해 그물의 수심을 조절할 뿐이다. 형식은 양식이지만 실제는 자연산인 셈이다. 이 정도면 전국의 어촌에서 미더덕 양식이 성행할 법한데, 진동면에 집중된 이유가 있다. “다른 곳에서는 잘 안 돼. 진동만 앞바다는 엄마 품속 같은 바다야. 수심이 깊으면서도 물살이 잔잔하고 플랑크톤이 많아. 미더덕 서식 환경과 작업 환경이 딱 맞아떨어지는 거지.” 이곳에서 미더덕 농사만 37년째 해 오고 있다는 오종근(64)씨의 자랑이다.
‘마산 아구찜’을 비롯해 해산물 요리에 들어 있는 미더덕을 씹다가 톡 터지는 순간 입천장을 덴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 쓰라린 순간에도 입안 가득 퍼지는 향긋한 바다 내음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요즈음 찜 요리에 들어가는 것은 미더덕의 사촌격인 돌미더덕이라고 보면 된다. 3~6월까지만 잡히기 때문에 지금은 살아 있는 미더덕을 접할 수 없다. 6월 이후에는 같은 그물에 돌미더덕이 붙는다. 향은 미더덕만 못하지만 오독오독한 식감은 오히려 낫다. 돌미더덕을 지역에서는 ‘오만둥이’라 부른다. ‘오만(온갖)’ 데 달라붙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란다.
둘을 한꺼번에 놓고 보면 차이가 확연하다. 미더덕은 겉껍질을 벗겨내면 만질만질하고 얇은 속껍질에 선홍빛 속살이 비친다. 마치 길쭉한 도토리 모양이다. 반면 오만둥이는 돌멩이처럼 표면이 오돌토돌하다.
제철이 아니지만 고현 어촌체험마을에서는 요즘도 냉동 미더덕 손질이 한창이다. 껍질을 깐 미더덕이 엄지손가락보다 굵다. 이것도 작은 편이고 보통 어린아이 주먹만하다고 한다. 그래서 제철 미더덕은 다른 요리에 맛을 내는 부재료로 쓰는 것이 아니라 회와 무침으로 먹는다.
고현마을 포구 주변으로 미더덕 전문식당이 여럿 있다. 하지만 봄이 오기 전까지 맛볼 수 있는 요리는 ‘미더덕덮밥’밖에 없다. 3대에 걸쳐 장사하고 있는 ‘이층식당’ 미더덕덮밥(1만2,000원)은 숙성시킨 미더덕 내장에 김 가루와 참기름만 더했다. 싹싹 비벼 한 숟가락 뜨면 고소함과 향긋함이 입안 가득 번진다. 진짜 봄 바다의 향기를 맛보려면 내년 3월 진동면에 가면 된다.
창원=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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