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매운동 여파는 지속 “명분에 실리 더해져 확산”
지난 7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로 단행된 국내 기업에 대한 일본의 수출 규제는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만 해도 국내 전자업계 효자 품목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소재 등의 수출 규제 강화는 일본에 의존적인 해당 기업들에겐 직접적인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일본의 수출 규제가 반년 가까이 흐른 현재, 상황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관련 기업들은 해당 품목의 수입선 다변화와 더불어 불확실성에 대비,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로 돌려놨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 기업인 인프리아에 나란히 투자하고 있다. 수년 전부터 인프리아에 꾸준하게 투자해 온 삼성전자에 이어 SK하이닉스도 3분기 보고서를 통해 투자 사실을 공개했다. 반도체 분야 대기업이 해외 기업 한 곳에 함께 투자를 지속하는 건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인프리아는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감광액)를 생산하는 업체다. 포토레지스트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와 함께 일본 수출규제 대상인 3개 품목에 속한다. 일본의 포토레지스트 수출 제재는 현재 우리 기업들이 메모리 반도체 생산에 널리 쓰지 않는 EUV용 포토레지스트로 제한돼 있어 당장 큰 차질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를 생산하는 미국 기업에 선제 투자, 미래 대응에 나선 셈이다. 향후 대외 불확실성을 감안한 조치로 풀이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EUV용 포토레지스트를 본격 투입하는 시점은 최소 2년 이후이지만, 공급선 다변화를 다양한 방면에서 빨리 시작하려 하고 있다”며 “램테크놀로지, 솔브레인 등 국내 관련 기업과의 거래도 확연히 늘었다”고 전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 9월 일본이 포토레지스트 1건, 불화수소 2건의 수출을 허가한 이후 추가 허가는 없었다. 하지만 관련 업계에선 현재까지 “생산 차질은 없다”는 입장이다. 삼성전자는 9월부터 국산 불화수소를 일부 공정에 투입해 3개월 이상 사용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는 10월부터 램테크놀로지로부터 불화수소를 납품 받아 양산에 도입했고, LG디스플레이 역시 9월 공정 전반에 쓰는 불화수소를 100%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삼성디스플레이도 10월 초 국산 불화수소를 생산라인에 적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오히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 규제 강화가 오히려 부메랑으로 돌아간 모습도 곳곳에서 감지되는 양상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국내 소비자들의 일본제품 불매운동. 일본 맥주와 의류, 담배 제품은 집중 포화를 맞았다. 지난 10월 일본 재무성 무역통계에서 맥주의 한국 수출액은 '0원'으로 집계됐다. 최근 '아사히' '기린' '삿포로' 모두 국내 편의점 납품가를 최대 30%까지 낮추는 강수를 띄웠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여전히 차갑다. 아사히 유통사인 롯데아사히주류는 급기야 계약직 사원들의 계약 연장 불가를 통보하면서 인력 감축에 나섰다. '산토리'를 들여오는 오비맥주나, 삿포로를 유통하는 엠즈베버리지 등 수입사들은 일본맥주 수입량을 대폭 줄이거나 아예 들여오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업체는 “사업 계획은커녕 존립을 걱정하는 상황"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여파는 주류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지난 1일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유니클로 감사제’ 행사 기간(11월 15~20일) 국내 8개 카드사의 신용카드 매출액 현황에 따르면 소비자들이 신용카드로 결제한 유니클로 제품 매출액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약 70% 떨어진 95억원에 그쳤다. 10월 매출도 전년 동기 대비 67%가량 감소했다. 유니클로를 운영하는 에프알엘코리아는 결국 인력을 711명 줄였다. '혐한 방송'으로 공분을 산 DHC코리아는 공식 온라인몰에서 최대 80% 할인 행사를 하고 있다. 헬스앤뷰티(H&B) 매장과 온라인몰에서 DHC 제품이 자취를 감춘 뒤 가까스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일본 담배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받고 있다. ‘메비우스’(옛 마일드세븐) 등을 판매하는 JTI(재팬토바코인터내셔널)코리아의 국내 편의점 담배시장 점유율(궐련 기준)은 수출규제 직전인 지난 6월 10%대였지만, 7월 8%대, 8~9월 7%대로 지속적인 하락세다. 관세청에 의하면 9월 일본 담배 수입액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90% 이상 줄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최근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 오염수 논란까지 불거지면서 일본제품 불매운동의 경우 명분(경제보복)과 실리(건강문제)가 합쳐진 형태로 확장될 것이란 전망도 내놓고 있다. 박나영 한국소비자생활협동조합연합회 정책개발팀장은 “일본제품 구매가 경제보복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맹하경 기자 hkm07@hankookilbo.com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류종은 기자 rje31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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