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능범죄, 당신을 노린다] <20> 약물까지 동원하는 ‘사기 골프’
지난해 10월 인천경찰청 광역수사대 조직3반으로 첩보 한 건이 들어왔다. 내기 골프로 3억원을 넘게 잃었는데 아무래도 ‘꾼’들에게 당한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첩보 속 피해자는 인천이 아닌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40대 사업가 A씨였다. 골프를 즐기는 A씨는 네이버 ‘밴드’에 등록된 한 골프 동호회에 2016년 가입했다고 했다. 그가 경찰에 범인으로 지목한 이들은 동호회에서 알게 돼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함께 라운딩을 한 김모(48)씨 일행이었다.
A씨가 경찰에 털어놓은 자초지종은 이랬다. 상당한 구력을 자랑하는 그는 필드에서 18홀을 80대 초중반 타수로 끝내는 실력자인데, 김씨 일행만 만났다 하면 90대 타수를 기록했다. 한두 번 그랬다면 당일 컨디션 문제나 자신의 운을 탓했겠지만 수십 차례 같은 스코어가 반복됐다. A씨는 적게는 경기당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수백만원을 번번이 김씨 일행에게 내줘야 했다.
광역수사대 형사들은 A씨의 이야기에 단순 사기사건이라며 다소 심드렁했다. 하지만 A씨의 이어지는 진술에 형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A씨는 김씨 등과 골프를 치면서 겪은 신체의 이상이 무엇보다 희한한 일이라고 경찰에 털어놨다. 전반 몇 개 홀을 돌고 나면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하면서 열이 났고 심하면 속이 메스꺼워 구역질이 올라오는 게 매번 똑같았다는 주장이었다. 분한 마음에 ‘꼭 이기겠다’는 오기에 불탔던 A씨는 반년 넘게 계속 당하면서도 설마 그게 범죄였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지인에게 “사기 당한 거야”라는 말을 듣고 신문 기사를 찾다가 비슷한 범죄 사례를 발견한 뒤에야 정신이 번쩍 들어 경찰을 찾았다는 게 A씨가 털어놓은 사기 골프의 전모였다.
◇진술은 일관되지만 모발 검사에선 ‘음성’
경찰은 A씨가 돈을 잃었을 때 느낀 어지럼증이 약물에 의한 것인지, 약물이 쓰였다면 종류는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우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모발 검사를 의뢰했다. 피해를 당한 지 거의 1년이 지났지만 종류에 따라 시간이 오래 흘러도 약물이 검출되는 경우가 간혹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말 국과수에 의뢰한 검사 결과는 한 달이 채 안 된 11월 중순쯤 경찰에 도착했다.
한 가닥 기대를 했지만 결과는 ‘음성’. A씨 모발과 소변 등에서는 약물이 전혀 검출되지 않은 것이다. 투약 여부를 직접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A씨가 주장하는 사기 피해를 입증할 길은 더욱 복잡해졌다. 경찰 입장에서 확보된 것이라곤 A씨의 피해 진술뿐이었다. 어쩌면 큰돈을 잃고 분에 못 이겨 신고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쉽지 않은 수사가 분명했지만 인천 광역수사대 형사들은 A씨 진술의 신빙성에 무게를 두고 계속 전진하기로 결정했다. 4차례의 조사 과정에서 피해자 진술이 일관됐고, 김씨 일당에게 송금한 금융거래 내역이 남아 있는 점으로 미뤄 아예 없는 사실을 지어내지는 않았을 것으로 판단했다.
A씨의 진술을 직접 들었던 김정준 인천 광역수사대 조직3반장은 “진술 신빙성을 가리기 위해 보통 보름이나 한 달 간격으로 다시 조사를 하는데, 상대방을 악의적으로 엮으려는 사람은 그 내용이 다른 경우가 많다. 거짓말을 오히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이 사건 피해자는 4번의 조사에서 떠올린 상대 인물들의 행동에 관한 진술이 일치했다”고 설명했다.
◇골프장 가는 피의자 차량에서 나온 약통
과거 사건에서 직접적 증거를 확보하기 어려워지자 형사들은 차선책으로 범행 현장에 직접 가 보기로 했다. 물론 증거 확보를 자신할 수 없는 일종의 ‘모험’이었다. 김 반장은 “피해자 진술을 토대로 지금도 분명 다른 피해자를 노리고 있을 거라는 추론을 믿어 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A씨가 밴드 동호회에서 골프를 함께 친 김씨 등 주요 인물을 추린 뒤 밴드에 올라오는 라운딩 일정을 토대로 급습할 시간과 장소를 물색했다. 올해 2월 말 법원이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해줘 형사들은 골프장으로 들어가는 김씨 일행의 벤츠 승용차를 멈춰 세울 수 있었다.
김씨 등은 경찰이 압수수색 영장을 제시하자 “진짜 영장 맞느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말하는 등 당황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경찰이 골프 가방을 뒤지자 노란색 액체가 담긴 물통이 나왔다. 경찰이 찾던 문제의 약물이었다. 따로 묻지도 않았는데 김씨 일행에게선 “몸이 안 좋아서 처방 받았다”는 변명부터 튀어 나왔다.
소지품 수색을 끝낸 형사들이 차량 트렁크를 열자 이런 변명조차 쑥 들어갔다. 트렁크 아래의 비상공구함 문을 열기까지 시간이 꽤 소요됐는데, 김씨 일행은 초조하게 그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비상공구함에서는 강한 수면 효과를 일으키는 신경안정제 약 80정이 담긴 약통이 나왔다. A씨가 진술한 것처럼 구토와 어지럼증을 유발하는 부작용이 있는 약이었다.
경찰은 압수수색으로 확보한 약품과 A씨 진술을 토대로 김씨 일당을 조사했다. 약을 물에 풀어서 쉽게 음료에 탈 수 있는 물통까지 현장에서 나왔는데도 김씨 일당은 “내기 골프는 쳤지만 약을 사용하지는 않았다”는 식으로 강하게 혐의를 부인했다. A씨가 라운딩 뒤 함께 찾아간 음식점 이름까지 일관되게 진술했지만 김씨 등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발뺌을 했다.
경찰은 불구속 상태에서 피의자들을 상대로 4개월가량을 끈질기게 조사, 결국 일당 중 1명의 자백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올해 6월에는 김씨 등 구속한 주범 2명을 포함해 모두 6명을 사기 및 마약류관리에관한법률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A씨 진술 등으로 추정되는 피해 금액은 훨씬 컸지만 증거가 확보된 15회의 사기 골프를 통해 뜯어낸 금액은 1억1,320만원으로 정리됐다.
◇1타에 5만원에서 200만원까지 급상승한 판돈
경찰 수사 결과 김씨 일당은 피해자의 애간장을 태우며 판돈을 끌어 올리고는 약물을 사용해서 확 불어난 판돈을 쓸어가는 수법을 사용했다. 처음에 1타에 5만원꼴로 시작된 내기는 홀을 거듭하면서 2배, 4배로 폭등했다. 한 홀에서 동점자가 나오면 다음 홀에선 판돈이 2배로 뛰는 규칙이 있었고 아쉽게 패해 약이 오른 피해자가 “더블”을 외치기도 했던 탓이다.
김 반장은 “한 타당 1,000원이라고 해도 이런 규칙으로 판돈이 오르면 마지막 홀에는 한 타에 50만원 이상의 판돈이 걸리게 된다”며 “약을 먹으면 바로 증상이 나타나는 게 아니다 보니 피해자도 3, 4홀까지는 따기도 하고 잃기도 하면서 판돈 늘어나는 데 거부감이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사기 골프 일당이 피해자에게 약을 먹인 장소는 주로 라운딩 전 아침을 먹기 위해 들렀던 음식점이었다. 20세때부터 골프를 치기 시작한 주범 김씨는 실내골프연습장을 운영했는데, 피해자가 필드에서의 결과를 아쉬워하면 자신의 연습장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스크린골프로 이어진 2차 내기에서도 직원에게 약을 넣은 커피를 타오게 해 피해자에게 건넨 것으로 조사됐다.
일당 6명 중 주범 김씨 등 2명은 지난 10월 18일 인천지법의 1심 선고공판에서 각각 징역 3년과 2년8월을 받았다. 투약에 관한 직접 증거는 없었지만 진술의 신빙성이 판결의 주된 근거였다.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이 범죄사실을 일관되고 구체적으로 묘사했고, 형사처벌 위험을 무릅쓰고 자백한 공범의 진술 태도가 신빙성을 의심할 정도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차량과 소지품에서 발견된 약품들의 부작용과 피해자 진술 등을 종합했을 때 신경안정제 투약과 내기 골프 점수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1심에서 인정된 내기 골프 횟수는 11회, 금액은 9,970만원으로 경찰 조사 내용보다 줄었다. 김씨 등은 모두 항소했다.
◇필로폰 주사까지 동원…‘사기 골프 주의보’
약물을 사용한 사기 골프는 A씨 사건이 처음은 아니다. 법원 인터넷 판결문 열람을 통해서 확인되는 3년간 사례가 최소 5건에 이른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피해자에게 접근해 내기 골프를 치면서, 여럿이서 한 패를 이뤄 약물을 탄 음료수를 먹여 판돈을 따 가는 수법이 전형적이다.
A씨 사건 주범인 김씨처럼 실내골프연습장 운영자가 범행에 가담하는 사례도 있었다. 2017년 인천 서구의 한 스크린 골프장 운영자는 신경안정제를 넣은 음료를 건네고 판돈을 따려다 실패, 사기미수 및 도박장소개설 등 혐의로 서울중앙지법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불법적으로 구한 마약류가 사용된 사건도 있었다. 지난 4월 부산에서는 필로폰이 들어있는 주사기를 사들인 뒤 커피에 필로폰을 타 상대에게 먹이고 1타당 최대 10만원짜리 내기 골프를 쳐 550만원을 딴 일당에게 징역 1년이 선고되기도 했다.
경찰은 스크린골프 확산으로 골프 인구가 급속히 늘면서 내기를 가장한 사기 골프 범행이 더 있을 것으로 보지만 아직 수면 위로 드러나는 사건은 많지 않다. 피해자가 처벌을 두려워해 나서지 않거나, 피해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약물을 이용한 사기 골프는 도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보다 상대방이 쳐놓은 그물에 걸리는 셈이라 신고자가 처벌 받을 가능성이 적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김 반장도 “A씨 사례와 마찬가지로 내기 골프를 치다가 일시적인 어지러움이 아니라 한두 시간 지속되는 어지럼증을 느낀다면 빨리 신고를 하는 게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당부했다.
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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