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자박 소읍탐방]<47> 국내 최초 슬로시티 신안 증도면
서해는 으레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여행지로 여겨진다. 수평선 아래로 잔잔하게 사그라지는 일몰 풍경에 지난 1년을 되돌아본다. 섬은 좀 더 특별하다. 일몰뿐만 아니라 일출까지 볼 수 있어서다. 여기에 드넓은 갯벌까지 더해지면 금상첨화다. 신안의 느린 섬, 증도를 다녀왔다.
◇밑 빠진 시루? 증도의 매력은 갯벌이 8할
증도(曾島)는 ‘시루섬’의 한자식 이름이다. 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난 시루처럼 물이 빠지는 섬이라는 의미다. ‘시루 증(甑)’이라는 글자가 따로 있지만 실제는 ‘일찍 증(曾)’자를 쓴다. 글자 자체가 바닥에서 올라오는 증기로 떡이나 쌀을 찌는 시루 모양이니 큰 상관이 없다.
물이 귀한 섬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증도는 자연생태가 잘 보전된 섬이다. 2007년 12월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 2008년 6월 국내 최초 갯벌도립공원, 2009년 5월 유네스코 생물보전지역, 2010년 1월 람사르 습지로 지정됐으니 국내외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해 질 무렵 증도 여행객이 가장 선호하는 곳이 ‘짱뚱어다리’다. 증도면 사무소 앞바다에서 짱뚱어해변을 연결하는 470m의 도보 전용 다리다. 일직선으로 뻗은 다리의 해변 쪽 난간은 둥스름하게 계단을 올랐다 내려오게 설계돼 있다. 증도 갯벌의 명물 짱뚱어를 형상화한 것이다. 갯벌에서 팔딱팔딱 뛰어다니는 짱뚱어는 훌치기로 잡는데, 겨울에는 뻘 속 깊이 숨기 때문에 짱뚱어도, 짱뚱어 잡이도 보기 힘들다. 대신 다리 입구에 통통하고 매끈한 짱뚱어 조형물을 세워 놓았다. 짱뚱어와 함께 갯벌 위를 돌아다니는 온갖 종류의 게를 바로 위에서 관찰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인데, 추운 날에는 이마저도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다리를 중심으로 드넓게 펼쳐지는 갯벌 풍경은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장관이다. 이곳 갯벌은 물이 완전히 빠져도 표면이 촉촉하게 젖어 있다. 찰기로 윤이 나는 갯벌에 주변의 산과 마을, 하늘빛이 고스란히 투영된다. 해가 질 무렵이면 갯벌은 거대한 황금벌판으로 변모한다. 짙고 옅은 노을의 농담까지 섬세하게 담아낸 자연의 대작이다. 누가 이 황금빛 갯벌을 회색빛이라 더럽다 할 수 있겠는가.
섬의 매력 중 하나가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우전리에 잡은 숙소 창 밖으로 발갛게 새벽 하늘이 펼쳐졌다. 좀 더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지만, 짙푸른 어둠을 밀어내는 붉은 기운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었다. 서둘러 외투를 걸치고 왕바위선착장으로 나갔다. 증도와 자은도 간 정기 여객선이 다니는 작은 선착장으로, 주변 해안에 커다란 바위가 많아 붙여진 지명이다.
일출 포인트는 선착장에 하나밖에 없는 음식점 ‘왕바위식당’ 앞이다. 일몰 때처럼 선착장 앞바다에 물이 빠지고 광활한 갯벌이 드러났다. 이때만은 신안의 그 많은 섬도 섬이 아니다. 수평선 부근 천사대교(신안 압해도와 암태도를 잇는 해상교량)까지 전부 갯벌인 듯하다. 새벽 하늘을 발갛게 물들인 여명이 차진 갯벌에 질펀하게 번진다. 일출의 순간, 태양은 물기 남은 갯고랑에 은은한 빛 줄기를 드리운다. 갯벌의 일출은 하늘이 특유의 파란색을 되찾을 때까지 계속된다.
참고로 왕바위식당은 인근에서 잡히는 제철 생선회가 주 메뉴다. 요즘은 숭어가 제철이다. 남미현 우전리 이장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임자도 앞바다에서 민어 파시가 열릴 정도로 일대 해역에서 민어가 많이 잡혔다고 한다. 같은 민어과인 부세가 많이 잡혔다. 해안을 무리 지어 이동할 때는 부세 울음소리가 개구리 울음처럼 야단스러웠단다. 한국에서는 굴비를 귀한 생선으로 치지만, 중국에서는 부세를 ‘황금조기’라 부르며 비싼 값에 사 간다고 한다. 굴비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부세를 맛볼 날도 오래 남지 않은 듯하다.
◇그 많은 보물은 어디로 갔을까
증도 서북쪽 해안 언덕에 ‘신안해저유물발굴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76년 증도와 임자도 사이 바다에서 우연히 그물에 걸린 도자기를 건져 올린 것을 계기로 1984년까지 9년간 해저 유물 인양작업이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중국 송ㆍ원나라 시대의 도자기 2만661점, 금속제품 729점, 석제 43점, 동전류 2만8,018kg, 자단목 1,017개 등 600여년간 바닷속에 잠겨 있던 보물이 건져졌다.
기념비 바로 앞 작은 바위섬(소단도)에 배 모양의 건물이 있어 박물관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이름만 ‘보물선’인 카페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은 대부분 국립광주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흩어졌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올 1월 이곳에서 발굴된 도자기 1만7,000여점을 광주박물관으로 이관했다. 기념비에서 내려다본 바다에는 도자기 모양의 커다란 부표만 이리저리 물살에 일렁이고 있을 뿐이다. 진짜 보물은 외지로 가고 껍데기만 남은 셈이다.
요즘 증도의 보물은 단연 천일염이다. 증도는 한때 두 개로 분리된 섬이었다. 위쪽은 선증도, 아래쪽은 후증도였다. 간척사업으로 두 개의 섬이 연결된 자리에 국내 최대 천일염 생산지인 태평염전이 들어섰다. 국내 천일염의 6%인 연간 1만6,000톤을 생산한다. 대초리 ‘소금밭 낙조전망대’에 오르면 활주로처럼 뻗은 1.5km 도로를 따라 전봇대와 소금창고가 나란히 연결된 모습이 보이고, 그 양편으로 바둑판처럼 소금밭이 펼쳐진다.
초입에 옛 소금창고를 개조한 소금박물관이 있고, 둑길을 따라 염생식물원까지 연결하는 산책로도 있다. 지금은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고랑 주변으로 갈대만 무성하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퉁퉁마디ㆍ칠면초ㆍ띠 등 염생식물이 초록과 분홍으로 물들이는 곳이다. 인근 함초식당에서는 소금족욕과 소금동굴 찜질 체험을 할 수 있다.
염전은 겨울 동안 쉬고 4월쯤 다시 소금을 생산한다. 허락을 얻어 들어간 소금창고에서는 막바지 출하 작업이 한창이었다. 힘겹게 자루에 퍼 담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운반차량이 대형 삽으로 컨베이어벨트에 소금을 부려 놓으면 커다란 자루에 우수수 쏟아지는 형식으로 작업이 이뤄진다. 무거운 소금 자루는 크레인으로 옮긴다. 소금처럼 짜디짠 땀방울을 흘려야 하는 작업은 아니지만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 외국인이어서, 이곳에서도 급격하게 바뀌는 노동시장의 변화를 실감한다.
◇엘도라도 황금해변, 우전해수욕장
엘도라도는 16세기 남아메리카를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이 아마존 강가에 있다고 상상한 황금의 나라다. 엘도라도는 증도에 단 하나 있는 복합 리조트이기도 하다. 이 리조트를 사이에 두고 설레미해변, 우전해변, 짱뚱어해변 등 증도의 ‘황금해변’이 이어진다. 주저 없이 황금해변이라 하는 이유는 모래가 고울 뿐만 아니라 썰물이면 수평선까지 펼쳐지는 해변 노을이 ‘짱뚱어다리’ 못지않게 부드럽고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우전해변과 짱뚱어해변은 하나로 연결돼 있다. 백사장 길이만 4km가 넘는 우전해수욕장을 2개 구역으로 나누어 부르는 것뿐이다. 여름철 유료로 대여하는 갈대 파라솔이 한겨울에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 노을 사진의 분위기를 더한다. 해변만큼 긴 솔숲도 운치 있다. 설레미해변에는 캠핑장이 조성돼 있다. 모래사장과 바로 맞붙은 지점에 텐트를 칠 수 있어 캠핑 동호인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증도만의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다면 ‘노둣길’로 연결된 화도를 다녀와도 좋다. 노둣길은 섬과 섬 사이를 연결한 길로 썰물 때만 드러난다. 갯벌에 놓았던 징검다리가 낮은 콘크리트 길로 바뀌었을 뿐이다. 섬과 섬 사이 ‘모세의 기적’이 증도에선 매일 2차례 벌어진다.
증도는 2010년 다리로 연결돼 섬 아닌 섬이 됐다. 증도대교에서 섬의 가장 먼 곳까지 15km 이내다. 천천히 운전해도 20분이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우전리 신안갯벌센터에서 자전거를 빌리면 슬로시티 증도를 더 느리게 즐길 수 있다.
신안=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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