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사 최병헌 초상. 정동제일교회 제공](http://newsimg.hankookilbo.com/2019/12/31/201912311091068535_7.jpg)
1948년 국가로 제정된 ‘애국가’의 작사가가 정동제일교회 초대 한국인 목사였던 탁사(濯斯) 최병헌(1858~1927)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애국가 작사가가 누구냐는 문제를 두고 도산 안창호(1878~1938)와 좌옹 윤치호(1865~1945) 등이 유력하게 거론됐으나 명백한 결론 없이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최우익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 교수는 1일 “후손들의 증언과 일부 사료를 봤을 때 최병헌 목사가 작사했던 ‘불변가(不變歌)’가 애국가의 원곡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최병헌의 증손자로 지난해 말 그간 연구성과를 모아 ‘탁사 최병헌의 개화사상과 민족운동’이란 책을 냈다.
후손들에 따르면 최병헌이 불변가를 지은 것은 그가 정동제일교회 목사로 재임(1903~1914)했을 무렵이다. 1858년 충북 제천의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최 목사는 권문세가의 자제들이 아니면 벼슬에 오르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해 개화사상과 기독교 신앙에 눈을 떴다.
그는 1888년 감리교 선교사 조지 존스(1867~1919)의 한국어 교사가 되면서 성경을 접하게 됐다. 최병헌의 한문 실력을 눈 여겨 본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1858~1902)는 그를 배재학당 한문선생으로 채용했다. 1903년 아펜젤러를 뒤이어 정동제일교회 초대 한국인 목사가 됐다. 이 때 이승만, 김규식 등 배재학당 출신들과 친목회를 결성했고, 이들이 해외로 떠날 때 불변가를 지어 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후손들은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과 서리에도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라는 애국가 2절 가사가 최병헌이 옛 정동교회 목사 사택에서 바라본 남산 풍경이라고 해석했다. 최 교수는 “당시 사택에서 남산의 울창한 소나무 숲이 보였고, 이 소나무들처럼 독립과 애국을 기원하는 마음은 변치 말자는 취지로 불변가를 지었다”며 “그가 남긴 책과 기록들에서도 소나무의 기상을 언급한 부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서울 정동의 정동제일교회 안뜰에 설치된 탁사 최병헌의 흉상과 기념비. 정동제일교회 제공](http://newsimg.hankookilbo.com/2019/12/31/201912311091068535_8.jpg)
윤치호와의 인연도 두텁다. 친일 이전 개화파 지식인이었던 윤치호는 정동제일교회 교인이었다. 최병헌보다 7살 어렸지만 둘은 막역한 사이였다. 후손들은 당시 불변가를 다 지은 최병헌이 윤치호가 쓴 황실가(‘무궁화가’) 일부 가사가 마음에 들어 윤치호 동의 하에 이를 붙였고, 그 때문에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부분이 후렴구로 남게 됐다고 봤다. 하지만 윤치호가 친일파라는 이유로 지탄을 받게 되자 애국가 작사가를 제대로 밝히기 어려웠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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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최 교수는 일제강점기 최병헌 목사의 민족운동에 주목했다. 최 목사는 독립협회를 결성했던 배재학당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민중계몽운동을 추진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회였던 협성회에서 발간하는 협성회보를 만들었고, 협성회를 주축으로 한 황성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해 1905년 국권을 잃자 애국계몽을 위한 강연에 나섰다. 최 교수는 “일제강점기 최병헌 목사는 의병활동 등 폭력적 방법보다는 기독교를 통해 개혁을 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민족운동을 펼쳤던 인물이다”라며 “그를 통해 일제강점기 종교의 역할과 의미를 재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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