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라면, 소주, 신발 재소환
#평소 개성 있는 패션을 즐겨 입는 고등학생 정의진(18) 군은 지난달 초 학교에서 친구들과 선생님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정군이 이날 입고 간 흰색 패딩점퍼 덕분이었다. 포대자루처럼 펑퍼짐한 모양의 패딩 가슴팍에 예스러운 글씨체로 커다랗게 새겨진 두 글자는 ‘곰표’.
국내 대표적 제분 회사인 대한제분의 밀가루 브랜드 곰표가 패션 브랜드 4XR과 협업해 내놓은 패딩이다. 친구들이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동안 부모님과 선생님은 “네 옷 그거 밀가루 (브랜드) 아니냐?”며 관심을 보였다. 온라인 사이트에서 판매 중인 곰표 패딩의 가격은 14만 5,000원. 25~70만원대까지 이르며 ‘등골 브레이커(부모의 등골을 휘게 할 만큼 비싼 상품)’라 불리던 아웃도어 브랜드에 비하면 가격도 비교적 저렴하다.
#서울에 사는 직장인 박이정(30) 씨는 지난 여름 고향집에 가면서 챙겨간 ‘오래된 소주’ 한 병 덕에 가족과 뜻 깊은 시간을 보냈다. 바로 하이트진로가 1970·80년대 하늘색 소주병 디자인을 복원해 지난해 4월 출시한 ‘진로이즈백’ 제품이다. 60대인 박씨 아버지는 “옛날에 마시던 그 소주 아니냐”며 박씨와 함께 추억을 나눴다.
뉴트로 열풍과 함께 다시 돌아온 ‘그때 그 시절’ 제품들이 밀레니얼, Z세대의 마음을 사로 잡는 동시에 부모 세대의 향수까지 자극하며 세대를 잇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뉴트로는 지난 한해 밀레니얼과 Z세대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뜨겁게 달군 대표적 ‘인싸템(주류가 즐기는 아이템이라는 뜻이 신조어)’이다. 뉴트로는 새로움을 뜻하는 ‘뉴(New)’와 ‘복고(Retro)’를 합친 신조어로, 옛 것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해서 즐기는 트렌드를 이르는 말이다. 단순히 복고를 뜻하는 레트로와도 구분된다.
뉴트로는 기성 세대에게는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고, 옛 제품을 경험해 보지 않은 젊은이들에게는 신선함과 새로움을 안기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얼핏 촌스러워 보이는 커다란 로고의 디자인 티셔츠나 점퍼, 추억의 운동화가 다시 거리를 메우는가 하면 단종되었던 추억의 과자, 음료 등이 다시 출시돼 유행하고 있다.
패션계 달군 뉴트로 열풍에, ‘한 물 간 브랜드’ 재소환
뉴트로는 ‘한물간 브랜드’ 취급 받던 추억의 패션 브랜드를 되살렸다. 뉴트로 패션 아이템 중 하나인 어글리슈즈(투박한 모양의 밑창이 두꺼운 신발)의 인기를 이끌어낸 것은 의류 브랜드 휠라다. 휠라가 1998년 출시 모델인 ‘디스럽터’를 복각해 2017년 내놓은 ‘디스럽터2’는 지난해 9월말 기준 판매량 300만족을 돌파했다.
1911년 시작한 브랜드의 오랜 역사를 잘 간직해온 휠라에 뉴트로 열풍은 다시 찾아온 기회였다. 1990년대 큰 인기를 누리다가 점차 시들해지며 한때 ‘부모님이 테니스 칠 때 입는 옷’ 쯤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16년 브랜드 리뉴얼 이후 휠라는 자신들의 강점인 유산을 활용, 과거 출시돼 인기를 끌었던 제품을 모티브로 한 신발을 출시했다. 휠라 관계자는 “휠라는 이탈리아에 아카이브 전시관이 있을 정도로 유산을 잘 보존하고 있다”며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제품을 복각해 재작년 내놓은 제품이 뉴트로 트렌드와 맞아 떨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28년여 전통의 국내 스포츠 브랜드 프로스펙스 역시 마찬가지다. 프로스펙스는 1980년대 출시 당시 소위 ‘국산 메이커’ 신발의 대표주자로 여겨졌으나 2000년대 이후에는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그러다 뉴트로 열풍이 불었고, 프로스펙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1981년 브랜드 출범 당시 썼던 ‘F’ 로고를 다시 가져와 ‘프로스펙스 오리지널’ 시리즈를 내놨다. 자칫 촌스럽게 느껴질 법한 옛 로고가 큰 인기를 끌자 프로스펙스는 올해부터는 아예 ‘F’로고를 브랜드 대표 로고로 전면에 내세우기로 결정했다.
뉴트로 제품이 밀레니얼과 Z세대에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이 ‘오래된 브랜드’들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대학생 박효식(27) 씨는 2년 전 한 달여 동안 매일같이 온라인 판매 사이트를 들락날락했다. 어글리슈즈의 인기에 서울 시내 대부분 매장과 온라인 판매 사이트에서 그가 찾던 제품이 동이 났기 때문이다. 어렵게 원하던 신발을 손에 넣은 박씨는 “(어글리슈즈는) 투박하고 오래된 느낌이 오히려 세련되게 느껴진다”며 기뻐했다.
과거 이들 브랜드를 즐기던 4050세대에게도 뉴트로의 유행은 반가운 소식이다. 직장인 이석재(49) 씨는 프로스펙스의 오리지널 로고 재사용 소식에 “수학여행을 앞두고 처음으로 ‘메이커’ 신발을 사 신고 황홀했던 기억이 떠오른다”며 “(80년대 당시만 해도) 짜장면 값이 500원인데 브랜드 신발이 3만원 정도라 살 엄두도 못 냈다”고 말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가볍게 마음 먹고 구매할 수 있다. 조만간 고등학생 두 아들, 부인과 함께 매장을 방문해 옛 추억을 함께 나눌 것”이라고 덧붙였다.
식품ㆍ주류업계, 무덤 속 유물을 살려내다
이 같은 과거 제품의 소환은 식품, 주류 업계에서도 빠지지 않았다. 이들 업계는 뉴트로 트렌드에 발맞춰 오래 전 단종된 제품을 재출시하거나 1980·90년대 제품을 뉴트로 풍 패키지로 리뉴얼한 제품을 속속 출시하고 있다.
하이트진로는 브랜드의 전통을 적극 활용해 주류 업계에서 뉴트로 열풍에 앞장 서고 있다. 지난해 4월 출시된 ‘진로이즈백’은 1970·80년대 출시됐던 진로 소주병 디자인을 다시 꺼냈다. 기존 초록색 병과 달리 투명한 하늘색 계열의 소주병에 한자로 새겨진 진로 라벨과 친근한 두꺼비 모습도 그려 넣었다. 진로이즈백은 2030 젊은이들 사이에서 SNS 인증샷 열풍을 타며 ‘인싸템’ 반열에 올랐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차별화된 마케팅을 생각하다 1924년 설립된 기업의 전통을 이용해보자는 차원에서 출시했다”며 “기성세대에게는 향수를 자극하고, 2030세대는 옛 감성을 새롭고 흥미롭게 받아들이게 한 것이 인기 비결”이라고 말했다. 진로이즈백은 지난해 4월 출시 이후 현재까지 판매량 1억병을 넘어섰다.
OB맥주는 지난해 10월 친숙한 곰 캐릭터와 복고풍 글씨체 등 옛 디자인을 활용해 ‘오비라거’를 출시했다. 특히 원조 OB라거 모델인 박준형과 최근 ‘곽철용 신드롬’을 일으킨 김응수가 등장해 1996년 당시 인기를 끌었던 OB라거의 ‘랄라라 댄스’를 추는 광고를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진로 역시 뉴트로 풍의 포스터를 제작하고, 80년대 주점의 분위기를 재현한 팝업 스토어 ‘두꺼비집’을 열면서 뉴트로 열풍을 적극 이용하고 있다.
식품 업계 역시 마찬가지다. 삼양식품은 1963년 삼양라면 첫 출시 당시 패키지 디자인을 그대로 재현한 ‘삼양라면 1963’과 80년대 사용했던 로고와 서체를 그대로 사용한 ‘별뽀빠이’를 다시 만들었다. 단종됐던 제품들이 다시 나오기도 했는데, 농심은 1982년 출시됐다가 1991년 단종된 ‘해피라면’을 뉴트로 감성을 살려 옛 포장 그대로 재출시했다. 제과업체 오리온 역시 2012년 단종 이후 재출시 요청이 많았던 ‘베베’를 7년 만에 ‘배배’라는 이름으로 다시 내놨다. 취업준비생 임선영(26)씨는 “(레트로 패키지의) 원색 색감이나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을 뿐 아니라 전통이 오래되고 역사가 있다는 느낌이 들어 레트로 패키징 제품을 즐겨 찾는다”고 말했다.
밀가루 포대 같은 패딩… 짬뽕 뉴트로까지 유행
뉴트로 트렌드에 발맞춰 식품업계와 의류업계 등 업계 간 콜라보레이션도 등장했다. ‘곰표 패딩’’곰표 쿠션’ 등으로 인기를 얻은 대한제분의 밀가루 브랜드 곰표가 대표적이다. 곰표는 2018년 화장품 브랜드 스와니코코와의 협업을 통해 쿠션 파운데이션, 핸드크림, 선크림 등 제품 외관에 곰표 로고를 그려 넣은 제품을 내놨다. 지난해 겨울에는 CGV 왕십리점에서 실제 포대 사이즈의 곰표 팝콘을 나눠주는 행사를 진행하는가 하면 올해는 편의점 CU와 함께 ‘곰표 팝콘’ 제품을 내놓기도 했다.
이들 제품은 특히 1020세대에서 SNS를 통해 빠르게 공유되며 곰표라는 브랜드를 알지 못했던 이들에게도 브랜드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정군은 “곰표라는 브랜드 자체를 이번에 알게 됐다”며 “큰 로고 때문에 이걸 누가 입고 다니느냐는 반응도 있었지만 교복 위에 입어 나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뉴트로 마케팅은 시장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한 몸부림의 결과이기도 하다. 곰표 관계자는 “40대 이상은 곰표를 알고 있지만, 지금의 1020은브랜드 자체를 알지 못한다. 대한제분이 잊히는 브랜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도 있었다”며 “70년된 브랜드이지만 지금도 새롭게 도전하고 있는 브랜드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밀레니얼과 Z세대 사이에서 부는 뉴트로 열풍을 모든 것이 빠르게 복제되는 디지털 문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틀에 박힌 문화에 싫증난 젊은 세대들이 낡은 것에서 새로움과 개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뉴트로는 단순히 향수를 추구하는 과거의 레트로와는 다르다”고 했다. 그는 “젊은 세대에게 옛 것이 힙 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디지털 세상에서는 하나의 제품이 뜨면 눈 깜짝할 사이에 비슷한 것들이 나타나고 독특함은 금방 사라져 버린다”며 “차라리 훨씬 멀리 떨어져 있는 제품이나 문화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젊은 세대가 유튜브 등을 통해 ‘탑골 OO’식으로 부모 세대가 과거 즐기던 문화를 스스로 찾아 즐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이들은 제품 하나를 구매하는 데에도 나만의 개성을 찾아 소비하려고 하기 때문에 뉴트로 제품을 사는데도 주저하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이미령 인턴기자 digita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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