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매주 수요일 <한국일보> 에 찾아옵니다. 2018년 한국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시대의창 출판사 김성실 대표가 글을 씁니다. 한국일보>
맞다. 그 해 겨울은 따뜻했다. 지난 연말, 크리스마스마켓을 돌며 글뤼바인을 취재하고자 독일로 떠났다. 프랑크푸르트를 시작으로 중세도시 로텐부르크와 뉘른베르크, 뮌헨과 드레스덴을 비롯해, 옛 한자동맹 도시인 브레멘을 거쳐 독일의 수도 베를린과 포츠담 등지를 빨빨 돌아다녔다. 어느 도시든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지고 오두막 부스가 늘어선 광장 마켓엔 사람들이 소복이 모여들었다.
독일 말로 바이나흐츠마르크트(Weihnachtsmarkt)라 불리는 크리스마스마켓이 처음 열린 때는 중세 후기라 한다. 유통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는 겨울나기에 필요한 생필품이나 고기 등을 사고파는 반짝 시장이었다. 지금은 크리스마스 전 약 한 달 동안 마켓이 열린다. 크리스마스 장식을 위한 소품, 호두까기인형 등과 같은 수공예품과 지역특산품, 슈톨렌이나 소시지, 햄 등 먹거리를 오두막 모양 부스에서 판매한다.
뭐니 뭐니 해도 크리스마스마켓의 주인공은 단연 글뤼바인이다. 길을 걷다 마켓 인근에 이르면 향긋한 향이 풍겨온다. 흔히 치과 냄새로 각인된 정향의 향이 두드러지는데 바로 글뤼바인의 향이다. 글뤼바인은 와인에 계피, 정향, 팔각, 육두구, 카다몸 등 향신료와 오렌지, 레몬과 같은 과일을 넣고 만든다. 기호에 따라 꿀과 설탕을 넣어 80도 이하에서 뭉근하게 데우듯 끓여 만든다(알코올의 끓는점이 78.3도이기 때문).
글뤼바인은 겨울 추위가 혹독한 독일 등 북유럽에서 몸을 덥히기 위해 데워 마시는 와인이다. ‘글뤼’는 ‘데우다’, ‘바인’은 ‘와인’을 뜻하니 이름이 노골적이다. 유래를 찾아보니, 고대 이집트 때부터라고도 하고 고대 로마 때부터라고도 한다. 어느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마 때는 ‘피멘트(Piment)’, 중세에는 ‘히포크라스(Hippocras)’라 했단다.
나라마다 이름도 다르다. 프랑스에서는 뱅쇼, 스칸디나비아에서는 글뢰그, 영어권에서는 멀드와인이라 한다. 우리에겐 뱅쇼로 더 알려졌지만, 실은 글뤼바인이 원조이다. 1400년경 포도를 재배해 와인을 만들던 독일의 어느 농부가 감기 예방을 위해 여러 향신료를 넣고 데워 마신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유럽와인법에도 글뤼바인 규정은 있지만 뱅쇼 규정은 없다.
여행을 가기 전에 자료를 많이 뒤졌다. 글뤼바인은 오래된 전통만큼 마켓 오두막마다 고유한 레시피가 있어 집집마다 맛이 다르다 했다. 커다란 통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게 데워서 즉석에서 잔에 담아주고, 잔(머그컵) 또한 각양각색이라 모으는 재미가 쏠쏠하단다.
그런데 이번에 경험한 마켓에선 오두막은 고사하고 도시 사이에도 레시피 차이가 거의 없었다. 독일에서 소비되는 글뤼바인의 80%를 차지한다는 게르슈타커사와 여러 회사에서 만든 기성품 와인을 쓰는 듯했다. 특히 뉘른베르크에서는 거의 모든 오두막이 그러했다. 아예 기성품 와인만 전시한 오두막도 여럿이었다. 게다가 큰 통에서 끓여 즉석에서 퍼주는 대신 대부분 스테인리스 보온통에 담긴 와인을 머그컵에 따라주었다. 종이컵에 따라주는 곳도 있었다.
여행을 준비하는 동안, 숙취를 풀어주던 달큰 뜨끈한 모주의 기억과 으슬으슬함을 달래주던 쌍화탕의 기억이 혼합되어, 마치 북유럽의 추위를 녹여주는 글뤼바인의 추억인 듯 소환되었는데…. 다소간 아쉬움이 겨울바람으로 불어왔다. 다행히도 도시 이름을 새긴 고유한 글뤼바인 잔이 있어 얼어붙을 뻔한 마음을 녹일 수 있었다.
글뤼바인 값은 보통 7~8유로였다. 마신 뒤 잔을 돌려주면 잔 값 2~3유로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필자는 잔 값을 돌려받지 않고, 10개 도시의 14개 마켓을 돌며 2019년, 그 해의 잔인 글뤼바인타세 9개를 모았다(5개의 마켓은 종이컵을 사용했다). 사실, 글뤼바인은 레드와인이 대부분인 줄 알았는데 젊은층이 많은 대도시에서는 화이트와 로제 와인이 인기였다. 와인 빛깔이 도드라지도록 잔도 머그컵 대신 투명한 것을 썼다.
마켓 풍경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자, 1990년대 독일 유학생이었던 분이 글을 덧달았다. “어리고 가난하던 시절 크리스마스마켓 구경하러 뉘른베르크에 갔었어요.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이라 여행 경비가 아주 저렴했던 기억이 나요. 공짜로 가르쳐주고 구경시켜주고 참 고마운 나라였는데….”
댓글을 읽어서였을까, 여러 도시를 도는 동안 내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그리웠다. 전혜린과 이미륵, 동백림사건을 겪어야 했던 재독 인사와 유학생, 광부, 간호사, 선박기술자, 병아리감별사…. 그들의 겨울도 따뜻했을까. 글뤼바인을 한 모금 마시자 어느새 내 몸에 온기가 감돌았다.
시대의창 대표ㆍ와인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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