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 설 연휴 직전 지인들과 가장 많이 주고받는 얘기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국토교통부는 이번 설 연휴에 3,200만 명이 이동할 거라 전망했습니다. 설이나 추석이 되면 인구의 절반을 훌쩍 넘는 이들이 가족 단위로 귀성 행렬에 뛰어들곤 합니다. 그래서 명절을 어떻게 치를지는 많은 사람의 공통적인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민족 대이동의 풍경이 요즘엔 다소 변하고 있는 듯합니다. 설을 맞아 요즘 명절 문화 변화를 알아보기 위해 서울시여성가족재단에 요청한 자료를 22일 받아보니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각자 자신의 부모를 찾아가 인사드렸어요”. 지난 추석에 재단이 ‘내가 겪은 성 평등 사례’ 설문(여성 718명 등 총 810명)을 진행해 나온 응답이었습니다. 부부가 따로 각자의 부모님을 만나러 갔다는 얘기였습니다. 이른바 ‘나홀로 본가족’의 등장입니다. 뜻밖이었습니다.
아니, 처음엔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명절에 부부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양가를 아예 찾지 않는 것도 아니고, 부모 집은 가는 데 각자 자신의 본가에만 간다니. 단순히 부부가 싸워 홧김에 각자의 고향을 찾은 것 같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애초 명절 성평등 사례 설문에 참여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어떤 배경이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재단에 연락하니 간단한 온라인 설문으로 진행된 터라 더 자세한 얘기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
유별난 사례였을까요.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설문지를 받고 지인들에 연락을 돌렸습니다. 나홀로 본가족은 예상 외로 가까이에 있더군요. 전화 세 통 만에 나홀로 본가족을 찾았습니다. 결혼한 여성 취재원 A씨였습니다.
사연은 이랬습니다. A씨는 지난 추석에 혼자 친가에 갔다고 했습니다. 그의 남편은 애를 데리고 따로 시댁을 찾았습니다. A씨 부부가 명절을 앞두고 싸워서가 아녔습니다. A씨가 들려준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그게 제일 편하거든요. 그래서 설이나 추석에 한 번은 다 같이 양가를 가지만, 나머지 한 번은 그냥 각자 집에 가요. 이번 설엔 시부모님이 올라오셔서 함께 보내고요.”
즐거워야 할 명절은 누군가에겐 때론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장시간 운전과 차례 음식 준비로 몸이 지치기도 하지만 심리적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습니다. 결혼 전엔 생면부지였던 시ㆍ처가 식구와 시간을 보내며 작은 갈등이라도 생기면 마음은 두 조각이 납니다. A씨는 부부가 따로 집에 가는 일이 “명절의 풍습을 흔드는 일”이란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나홀로 본가족을 택했습니다. 눈치는 보이지만 그것보다 내가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필요했고, 그게 중요했던 겁니다.
A씨와 비슷한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지난해 상반기 방송된 KBS 다큐멘터리 드라마 ‘회사 가기 싫어’에선 영업기획부 신입사원 노지원(27)씨가 입사 첫날 “약속이 있다”며 회사 회식 참여를 거부합니다. 당돌한(?) 신입사원의 행보에 선배들은 놀라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사무실에 들이닥친 싸늘한 공기, 노씨는 전혀 쪼그라들지 않습니다. 그는 혼자 점심을 먹고, “선배보다 먼저 퇴근이냐?”란 말엔 “제 일 다 끝났는데요”라며 가볍게 자리를 뜹니다. 주변의 시선 ‘따위’에 주눅 들지 않지요.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직원들에 선물했다는 책 ‘90년대 생이 온다’에서 주목한 그 90년대생이었습니다. 희생보다는 자유와 휴식을, 목표보단 현재의 행복을 중시한다는 세대였습니다. 나홀로 본가족인 A씨도 노씨와 같은 90년대생입니다. 명절에 독립을 꿈꾸는 이들의 특징을 세대적 특성으로 단정 짓는 것은 무리겠지요. 하지만 앞선 세대들에게선 쉬 찾아보기 어려웠던 행보인 건 사실이기도 합니다.
여성만의 일은 아닙니다. 나홀로 본가행은 부부의 동의 없인 불가능한 일입니다. 나홀로 본가족엔 젊은 남성들도 동참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결혼 2년 차에 접어든 여성 B씨(35)에게서 다음과 같은 힌트를 얻었습니다. “여자들 시가 스트레스 못지않게 요즘엔 남자들도 처가 스트레스가 크다고 하더라고요.” 성별에 관계 없이 명절 독립을 외치는 부부가 늘고 있는 이유(귀성 대신 ‘호캉스’, 차례는 저녁에…달라지는 설 풍경ㆍ1월23일자 15면)입니다. 당신의 설은 어떻습니까.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