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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화] 봉준호 영화엔 ‘지하인간’이 있다

입력
2020.02.05 04:3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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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괴물'에서 강두 가족이 딸의 행방을 찾아 한강 주변 하수도를 수색하고 있다. 터널과 지하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을 관통하는 공간이다. 쇼박스 제공
영화 '괴물'에서 강두 가족이 딸의 행방을 찾아 한강 주변 하수도를 수색하고 있다. 터널과 지하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을 관통하는 공간이다. 쇼박스 제공

“만화가가 됐을 거예요.”

지난달 5일(현지시간) 제77회 골든글로브상 시상식,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2019)으로 한국 영화 최초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뒤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만일 영화감독이 안 됐다면”이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봉 감독은 어린 시절 영화만큼 만화를 좋아했다. 만화를 자주 봤고, 종종 그렸다. 대학시절 학보에 시사만화를 연재하기도 했다.

“기다란 열차를 끝에서 앞까지 화면 가득 보여주면 얼마나 근사할까.” 봉 감독이 ‘설국열차’(2013)를 기획할 때 정윤철 감독에게 한 말이라고 한다. “봉 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 이야기보다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는 스타일”이라고 정 감독은 말했다. 만화를 좋아하고, 만화가를 꿈꾸기도 했던 감독답다. 봉 감독은 자신의 영화 콘티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연쇄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박현규(박해일)는 심연 같은 열차 터널 속으로 사라진다. 사건이 장기 미제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연쇄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박현규(박해일)는 심연 같은 열차 터널 속으로 사라진다. 사건이 장기 미제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영화 '기생충'에서도 지하는 주요 배경이자 소재이다. CJ ENM 제공
영화 '기생충'에서도 지하는 주요 배경이자 소재이다. CJ ENM 제공
영화 '괴물' 속 괴물은 사람들이 존재조차 모를 음습하고 어두운 공간에 서식한다. 쇼박스 제공
영화 '괴물' 속 괴물은 사람들이 존재조차 모를 음습하고 어두운 공간에 서식한다. 쇼박스 제공

‘비주얼리스트’ 봉 감독의 영화들을 관통하는 이미지는 뭘까. 터널과 지하공간이다. 봉 감독의 영화 속에서 지하공간은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지만 지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은밀한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다. 봉 감독은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부터 지하공간에 집착했다. ‘플란다스의 개’에선 사라진 개들의 행방을 알 수 있는 곳, 아파트 건설 과정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을 수도 있는 곳으로 표현됐다.

‘살인의 추억’(2003)에서 형사들은 지하공간에서 용의자를 취조한다. 고문 등 가혹 행위로 가짜 진술이 음습한 지하실에서 만들어진다. ‘괴물’(2006)에서 돌연변이 생명체가 은거하는 곳도 다리 밑 지하 같은 곳이다. ‘설국열차’(2013)에서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진 기관실 내 장소로 지하공간이 활용된다. ‘기생충’에선 영화 후반부를 뒤흔드는 대반전이 지하 비밀 벙커에서 벌어진다.

지하공간은 종종 터널처럼 좁고 기다란 공간과 병치된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등장인물들은 아파트 지하공간의 복도를 응시한다. 좁고 긴 아파트 복도를 내달리기도 한다. ‘살인의 추억’에서 연쇄 살인마의 희생자가 첫 발견되는 곳은 덮개가 덮인 수로다. 유력한 용의자 박현규(박해일)는 열차 터널로 들어가며 사라진다.

‘마더’(2009)에서 윤도준(원빈)에게 괴이한 일이 벌어지는 곳은 흉가의 어두운 통로다. 터널은 블랙홀 또는 심연과 같다. 불가해한 일이 불현듯 벌어지고, 진실을 삼킨다. 터널은 때로 경계를 상징한다. ‘설국열차’에서 열차가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사람들은 새해를 맞는다(열차 자체가 기다란 터널 이미지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기생충’에서 기택의 가족이 폭우를 맞으며 자신들의 반지하 집으로 돌아갈 때 통과하는 터널은 부자와 빈자의 세계를 나눈다.

영화 '괴물'의 노숙자(윤제문)은 주변인이지만 괴물 퇴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쇼박스 제공
영화 '괴물'의 노숙자(윤제문)은 주변인이지만 괴물 퇴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쇼박스 제공
영화 '플란다스의 개'에서 아파트 지하에 몰래 거주하는 부랑자 최모씨가 이야기의 열쇠를 쥐고 있다.
영화 '플란다스의 개'에서 아파트 지하에 몰래 거주하는 부랑자 최모씨가 이야기의 열쇠를 쥐고 있다.

어두운 지하공간과 그 주변에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산다. 부랑자 또는 노숙자, 금치산자로 불릴 이들은 지상에선 지워진 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해 영화를 뒤흔든다. ‘플란다스의 개’의 최모씨(김뢰하), ‘괴물’의 노숙자(윤제문), ‘기생충’의 근세(박명훈)가 그랬다. 지하와 터널과 비주류 인물들의 결합, 봉 감독은 평소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소재로 스릴과 서스펜스를 만든다. 20년 전 봉 감독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엔 이미 지하인간이 있었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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