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상식이 끝난 지 열흘 가량 지났지만,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고 있죠. 미국 아카데미 4관왕에 빛나는 영화 ‘기생충’ 말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하는 움직임부터 봉 감독 굿즈까지, 전세계에 연일 ‘봉준호 신드롬’이 불고 있죠.
봉 감독은 최근 청와대의 초청도 받았습니다. 오는 20일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는데요. 문 대통령은 문화예술인의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위한 지원의 뜻을 밝힐 것으로 예상돼요.
봉 감독은 지난 정권 블랙리스트에 올라 문제 인사로 취급됐던 터라 이번 청와대 초청의 의미가 남다릅니다. 사회 저항을 부추겼다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인사는 어떻게 세계 영화 역사를 다시 쓴 국민적 영웅이 될 수 있었을까요. (관련기사를 더 보려면 : 놀랍다! 기생충 4관왕… ‘백인들만의 리그’ 92년 만에 허물다)
◇왜 ‘블랙’ 딱지를 붙인 거야?
블랙리스트의 역사는 10여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갑니다. 봉 감독은 두 번이나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랐어요. 먼저 2009년 이명박 정부의 ‘좌파 연예인 대응 태스크포스(TF)’가 관리한 82명의 명단에 포함됐습니다. 2014년 박근혜 정부가 작성한 ‘문예계 내 좌성향 세력 현황 및 고려사항’ 보고서에 기재된 249명에도 ‘문제 인물’로 이름을 올렸죠. 이 같은 사실은 2017년 국가정보원이 정치 개입 의혹을 조사하고자 만든 개혁위원회가 공개하면서 알려졌어요. (관련기사 더 보려면 : 탁현민ㆍ이준기도 문화계 블랙리스트)
이명박ㆍ박근혜 정권은 왜 봉 감독을 블랙리스트로 올린 걸까요. 그가 진보 정당의 당원이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로 보입니다. ‘문예계 주요 좌성향 인물 현황’이란 문건에서는 ‘봉준호-민노당 당원’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봉 감독이 만든 영화들에도 ‘블랙’딱지를 붙입니다. 2018년 작성된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보고서’에는 두 정권에서 블랙리스트 대상으로 지목한 상업영화 15편이 나와요. 여기에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설국열차’(2013) 등 봉 감독의 영화가 무려 3편이나 포함됩니다.
그 영화들을 다 봤다면 뭐가 문제라는 건지 궁금하시죠? ‘살인의 추억’은 “경찰을 비리 집단으로 묘사, 부정적 인식을 주입했다”, ‘괴물’은 “반미 정서와 정부의 무능을 부각해 국민의식을 좌경화했다”는 이유입니다. ‘설국열차’는 “시장 경제를 부정하고 사회 저항 운동을 부추겼다”고 평가를 했어요. 무슨 군부독재 시절의 평가 같죠?
◇ 봉 감독은 악몽을 꿨다고?
블랙리스트의 목적은 명단에 올라온 인물에 대한 지원을 끊고 이들이 자금지원 기관의 주요 보직에 앉지 못하도록 인사검증을 하기 위한 겁니다. 이들에 대한 비리 등의 증거를 확보해 필요 시 압박하는 전략도 들어있죠. 이에 따라 예술가들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섭외가 불발되거나, 방송 혹은 영화에서 하차했습니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는 피해가 이어졌죠.
문화계 블랙리스트 피해를 입은 인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당시의 고통이 생생히 느껴집니다. 작곡가 김형석은 2017년 MBC 예능프로그램 ‘복면가왕’에서 돌연 하차해 외압이라는 말이 돌았죠. 이후 그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하차의 배경도 드러났습니다. 김형석은 그 해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보이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게 가장 큰 공포였다”고 회고했죠. (관련기사 더 보려면 : 김형석 “대통령 의전곡 없는 게 안타까워 ‘미스터 프레지던트’ 만들었죠”)
배우 송강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린 영화 ‘변호인’에 출연하고 세월호 특별법 제정운동에 서명했다가 블랙리스트에 올랐는데요. 그는 2017년 본보 인터뷰에서 “블랙리스트는 직접적 불이익보다 창작자들을 획일화시킨다는 점이 가장 큰 폐해”라고 지적했어요. (관련기사 더 보려면 : [문화산책] 송강호 “평범한 이들의 희망 전하고 싶다”)
배우 김규리는 2017년 9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이 몇 자(블랙리스트)에 나의 꽃다운 30대가 훌쩍 가버렸네. 10년이란 소중한 시간이”라며 연예계에서 배제 당한 시간들에 허탈함을 드러냈죠.
영화는 흥행했지만, 봉 감독에게도 지난한 고통의 시간이었을 겁니다. 봉 감독은 2017년 외신 인터뷰에서 “대단히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 “한국 예술가들을 깊은 트라우마에 잠기게 했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해외도 블랙리스트에 관심이 많다고?
네, 어려움을 딛고 선 봉 감독의 성공을 외신도 높게 평가합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영화 ‘기생충’의 성과를 “한국 민주주의의 승리”로 평가했죠. 10일(현지시간) 오피니언 면에 게재한 변호사 네이선 박의 칼럼에서 “블랙리스트가 계속 됐더라면 ‘기생충’은 오늘날 빛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네이선 박은 봉 감독 영화에 대한 당시 정부의 시각도 상세히 전했어요. 이번 영화의 배급과 투자를 맡은 이미경 CJ그룹 부회장과 배우 송강호도 블랙리스트에 올라 정권의 압박을 받았다고 지적했지요. 그러면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그린 ‘기생충’은 자유로운 사회가 예술에는 너무나 중요하다는 교훈을 일깨워준다”고 했습니다.
영국 가디언도 같은 날 기사에서 봉 감독이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가디언은 “박근혜 대통령은 300여명이 목숨을 잃은 세월호의 비극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예술가들과 작가 9,473명에 대해 국가 지원을 끊었다”면서 “몇 년 전만 해도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던 인물의 굉장한 반전”이라며 봉 감독을 추켜세웠죠. 독일 잡지 슈피겔도 봉 감독의 수상 소식을 전하며 블랙리스트 이력을 거론했습니다. (관련기사 더 보려면 : 가디언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봉준호의 놀라운 반전”)
◇한국당은 왜 지금 눈총을 받지?
‘기생충’ 열풍에 뻔뻔하게 숟가락을 올렸다는 눈총인데요. 봉 감독이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를 당시 여당이었던 미래통합당(옛 자유한국당)이 봉 감독의 인기에 편승해 ‘봉준호 마케팅’을 벌인다는 지적이에요.
봉 감독의 고향인 대구 지역 한국당 예비후보들은 봉준호 생가터 복원, 동상 건립 등을 제안하거나, 문화ㆍ예술계 지원을 약속하며 봉 감독을 홍보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대구 중ㆍ남구의 배영식 한국당 예비후보는 봉준호 ‘영화의 거리’부터 생가터 복원, 동상 건립, 기생충 조형물 설치 등을 약속했죠. 대구 달서구병의 강효상 한국당 예비후보는 두류공원에 봉준호 영화박물관을 세우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기생충’ 포스터를 패러디하거나, 봉 감독과의 인연을 자랑하는 의원도 있었죠. (관련기사 더 보려면 : ‘기생충’에 기생하려는 정치권… ‘봉준호 영화박물관’ 공약까지)
이에 더불어민주당이 작심 비판에 나서기도 했는데요. 조정식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13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정책조정회의에서 “영화 ‘기생충’에 숟가락 얹기 전에 한국당은 박근혜 정권에서 자행된 문화예술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해 석고대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좌파 성향이라는 이유로 봉 감독을 깎아 내릴 땐 언제고, 이제와 그 덕을 보려 하냐는 겁니다. 한국당의 한 의원은 지난해 ‘기생충’을 두고 “체제 전복의 내용을 담고 있는 전형적인 좌파 영화”라고 비판하기도 했었죠.
◇봉 감독을 블랙리스트에 올린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데?
블랙리스트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구속기소 돼 재판에 넘겨졌죠. 하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달 30일 직권 남용 권리행사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김 전 비서실장과 조 전 정무수석 등에 대해 유죄를 인정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직권남용 혐의 등에 대한 일부 유죄 내용은 인정하면서도 개별 범죄 사실에 대해서는 엄격한 심리가 필요하다는 취지였죠. 박근혜 정부의 보수단체 불법 지원(화이트리스트)에 대해서도 대법원이 직권남용 혐의를 인정했으나, 강요죄는 무죄 취지로 판단해 13일 원심으로 파기 환송했습니다. (관련기사 더 보려면 : 대법, 김기춘·조윤선 ‘화이트리스트’도 파기환송 “강요죄 성립 안 돼"”)
문화계에서는 2018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가 권고한 책임규명 권고 대상자 131명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징계가 내려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관련자 대부분이 ‘주의’ 처분만 받았기 때문인데요. 당시 예술인들의 1인 시위, 거리 행진 등 반발이 이어졌었죠.
‘징계 0명’의 셀프 면책이라는 비판이 나오자 문체부는 그 해 말 책임 규명 이행 계획을 재검토했어요. 그러나 대부분의 블랙리스트 실행이 2015년 11월 이전에 이뤄졌고, 징계 시효는 3년이라 2018년 12월 시점에서 징계가 가능한 이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고 해요.
지난 11일 ‘문재인 정부, 블랙리스트 적폐청산 어디까지 왔나’라는 주제의 토론회에서 미술작가인 정윤희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 블랙위원회 위원장은 “미진한 적폐청산은 국민을 향한 2차 가해로 증폭될 수밖에 없다”며 “블랙리스트 문제는 이미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관련기사 더 보려면 : “블랙리스트가 공무원의 통상 업무라는 뜻인가” 대법 판결에 문화계 분노)
지난해 김영주 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예술인의 지위 및 권리보장에 관한 법률안’도 국회에 계류 중입니다. 예술인에 대한 권리 침해 행위를 막고 성 평등한 예술 환경을 만들며, 실효적 피해 구제 방안을 마련한다는 취지인데요. 제대로 된 입법 논의가 이뤄지지 않아 20대 국회 마감으로 법안이 폐기될 위기에 처해있어요.
‘기생충’의 화려한 성공 이면에는 예술인들의 남모를 고통이 숨어있었습니다. 정치권이 기생충 특수보다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여기서 잠깐
‘기생충’에 얹으려는 숟가락은 몇 개?
‘기생충’ 열풍에 편승하려는 사례는 비단 정치권뿐만이 아닙니다. ‘기생충’을 홍보에 활용해 특수를 맞은 업체가 있는가 하면, 봉 감독 인기에 ‘기생’한다는 눈총을 받은 경우도 있어요.
숟가락1- 칠레의 와인업체 비냐 모란데는 ‘기생충’에 자사 제품이 등장했다며 SNS를 통해 홍보글을 올렸는데요. 와인이 등장한 장면은 고작 3초 가량이라 무리한 홍보라는 조롱이 이어졌죠. 결국 이 업체는 SNS 글을 삭제했습니다.
숟가락2- 한 인도 영화 프로듀서는 ‘기생충’이 자신의 영화 ‘민사라 칸나’를 표절했다며 고소할 예정이라고 밝혔어요. 극중 주인공의 가족이 모두 백만장자의 집에 고용된다는 부분이 비슷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대다수 누리꾼들은 “노이즈 마케팅 아니냐” “봉 감독 인기에 편승하려 한다”며 싸늘한 반응을 보였죠.
숟가락3- 반면 농심은 ‘기생충’ 수혜를 톡톡히 누리고 있어요. 농심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한 데 섞은 ‘짜파구리’가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거든요. 농심은 기생충이 개봉하기 전 영국 런던의 ‘프린스 찰스 시네마’에서 관객들에게 짜파구리를 선물하는 이벤트를 벌여 호응을 얻었습니다. 다음달부터 미국 월마트, 코스트코 등 대형마트에서도 짜파구리 컵라면을 판매한다고 해요. (관련 기사 더 보려면 : 뉴욕 레스토랑에 등장한 ‘한우 짜파구리’ 가격은?...짜파구리도 신드롬)
이소라 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