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털보다 가벼운 그 놈이 짓누르는 무게가 천근만근이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나노 단위로나 측정 가능한 그 바이러스에 전국민이 질식할 지경이다. 다중이 모이는 행사는 최대한 자제하라 했으니 올해 전국의 매화축제는 일찌감치 사람 없는 꽃 잔치가 되고 말았다. 광양 순천 하동 양산 등 남녘에서 개화 소식이 전해질 즈음, 강원도 산간 지역엔 뒤늦은 눈꽃이 만발했다. 지난달 27일 태백과 정선의 경계인 함백산에도 하얗게 눈이 내렸다. 조금이라도 ‘안구정화’하고 마음의 위로가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함백산과 만항재의 설경을 전한다.
◇바위처럼 나무처럼…우리도 잘 견디고 있다고
태백에는 확진자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한 경계는 타 지역과 다를 게 없었다. 안전 체험 테마파크인 ‘365세이프타운’, 지역 석탄산업의 역사를 보여 주는 ‘태백석탄박물관’ 등 주요 관광시설은 사태가 안정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문을 닫았다. 이곳 방문객을 상대하는 인근 장성동과 소도동의 식당 역시 문 닫은 곳이 수두룩했다. 인터넷에서 평가가 좋은 식당 네 곳을 들렀으나 문이 닫힌 상태였고, 다섯 번째 식당에서 겨우 점심을 해결할 수 있었다. 시내 중심부가 아니면 영업을 하는지 미리 확인하는 편이 현명하다.
소도동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함백산으로 향했다. 해발 1,573m 함백산은 남한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산이다. 높이에 비하면 등산은 상대적으로 쉽다. 해발 1,300m 부근까지 도로가 잘 닦여 있기 때문이다. 장담컨대 제설작업만큼은 태백시가 전국에서 으뜸이다. 웬만큼 눈이 와도 차량 통행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치워져 있다. 등산로 입구에서 정상까지는 약 1km, 제법 가파르지만 넉넉잡아 1시간이면 충분히 오를 수 있다. 장시간 산행을 즐기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성비 갑’이다.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신경준이 저술한 ‘산경표’에 함백산은 대박산으로 기록돼 있다. 산경표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나간 전국의 산맥 분포표다. 대박(大朴)은 태백(太白)ㆍ함백(咸白)과 함께 ‘크게 밝다’라는 의미라 한다. 정상에서 사방으로 펼쳐지는 드넓은 풍경과 더불어 눈 덮인 겨울에 더욱 어울리는 이름이다.
해발 600m 안팎인 태백 시내에는 진눈깨비로 내린 눈이 곧 녹아 내렸지만, 구불구불 함백산으로 오르는 도로 양편의 나무에는 이미 눈꽃이 피어 있었다. 등산로 입구에 10대가량 주차할 공간이 있었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본격적인 산행에 나섰다. 입구는 의외로 길이 넓다. 산 정상에 방송 송신 시설이 있기 때문이다. 등산로는 도로를 따라가다 곧장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숲길로 들자마자 오르막이 시작된다. 정상까지 짧은 구간에서 고도가 270m가량 높아지는 길이니 두어 차례는 숨을 헐떡거릴 정도로 가파르다.
주위는 점점 순백으로 변한다. 잎갈나무와 떡갈나무 등 키 높은 나뭇가지마다 눈이 소복소복 쌓였다. 한 걸음씩 오를수록 나무의 높이는 땅과 가까워져 정상 부근에 다다르면 사람 눈높이와 엇비슷해진다. 기후 변화가 무쌍하고 바람 센 고산에 살아가는 지혜다. 진달래와 철쭉으로 보이는 여린 가지를 눈송이가 솜털처럼 두르고 있다. 몽실몽실한 순록의 뿔 같다. 5월이면 하늘거리는 꽃송이가 산정을 분홍빛으로 물들일 테지만 그때까지는 몇 차례가 될지 모를 눈보라를 견뎌야 한다.
마지막 오르막 구간을 통과하면 바로 앞이 정상인데, 길은 짙은 구름에 가려 끝이 보이지 않는다. 안개 속이다. 눈 이불을 뒤집어쓴 나무는 한껏 키를 낮추고 막바지 겨울을 잘 견디고 있다. 모두를 움츠리게 만드는 불확실성이 하나씩 걷히면 감염병의 불안과 공포도 봄눈처럼 사라지겠지. 그때까지 우리도 의연하게 견뎌 낼 일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정상에서 약 30분을 기다렸다. 바람마저 잦아들어 미동도 없을 것 같은 구름 사이로 북서쪽 능선이 갑자기 환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만항재에서 정선 새비재까지 이어지는 운탄고도다. 해발 1,000m 안팎의 능선을 따라 연결된 운탄고도는 석탄산업이 호황이던 시절 기차역이 있는 신동읍까지 석탄을 가득 실은 탄차가 오가던 비포장도로다. 검은 먼지 풀풀 날리던 길은 세월이 흘러 여행객을 위한 고원 산책길로 바뀌고, 구름 속으로 석탄을 운반하던 길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이 붙었다. 산업화의 동력이자 광산촌 주민들의 고달픈 흔적이었던 운탄고도 능선에는 지금 풍력발전기가 줄줄이 세워져 있다.
태백 방향 하늘은 끝내 열리지 않았지만, 운탄고도 능선은 몇 번이나 구름에 가려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이따금 파란 하늘이 보이고, 짙은 구름 속에서 햇살이 부서지는 등 빛과 안개가 어우러져 장엄한 대자연의 쇼를 펼쳤다.
세상의 모든 시름을 단번에 날려버릴 이 장관을 앞에 두고도 마음은 개운하지 않았다. 30분가량 머문 정상에서 만난 등산객은 고작 10명이 되지 않았다. 개중에는 산꼭대기에서도 마스크를 벗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청주에서 음악학원을 한다는 한 남성은 평일인데 어떻게 이곳까지 왔냐는 질문에 푸념으로 대꾸했다. “죽겠습니다. 학생들도 다 떨어져 나가고….” 학원도 문을 닫았으니 취미로 하는 사진도 찍을 겸, 허탈한 마음도 달랠 겸 눈 내리는 날 맞춰 왔다고 했다.
하산하는 길에 먼저 내려간 누군가가 눈 위에 물을 뿌려 써 놓은 글씨가 눈길을 잡았다. ‘corona19, 디졌다.’ 어법에 맞지 않고 다소 과격한 표현인데도 거슬리지 않았다. 전국민을 고통으로 몰고 있는 이 감염병에 결코 굴하지 않고 꼭 이겨내고 말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 같아서다. 전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한마디에 불쑥 힘을 얻는다. 나와 아무 상관 없다고 여겼던 이웃이 알고 보면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는 요즘이다.
등산로 입구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다시 가루눈이 소리 없이 날리고 있었다. 함백산은 4월에도 눈 구경이 어렵지 않은 곳이다. 하루빨리 사태가 진정되고 뒤늦게나마 편한 마음으로 설경 나들이를 할 수 있길 기대한다.
◇만항재에서…눈꽃보다 반가운 웃음꽃
설산 산행이 정말 자신 없는 이들에게는 만항재가 안성맞춤이다. 태백 정선 영월의 경계 지점인 만항재는 해발 1,330m로 국내에서 포장도로가 통과하는 고개 중 가장 높다. 함백산 등산로 입구와는 약 2km 떨어져 있는데, 두 지점을 연결하는 도로는 제설작업이 돼 있지 않았다. 눈 오는 날에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에는 고도 차이에 따른 기후 변화가 실감난다. 함백산보다 조금 낮을 뿐인데 만항재 설경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대신 고갯마루 일대를 공원처럼 잘 가꾸어 가볍게 고원 산책을 즐길 수 있다.
눈가루가 흩날리던 지난달 27일 코로나 여파에도 불구하고 만항재에는 설경을 즐기려는 가족 단위 여행객이 제법 많았다. 아이들을 갑갑한 집 안에만 가둬둘 수 없으니 그나마 사람 적은 곳을 찾아 먼 길을 나선 듯했다. 하얗게 눈 덮인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곧장 빼곡한 잎갈나무 숲이다. 잎 대신 눈꽃을 피운 나뭇가지가 하늘 꼭대기까지 쭉쭉 뻗었다. 연인이든 가족이든 숲 속에 들어가면 누구나 판타지 영화 속 주인공이다. 때마침 강아지를 데리고 온 아이가 눈밭을 내달린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숲 속 공기보다 청량하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평범했던 일상의 풍경이 눈물겹도록 반갑다.
만항재는 봄부터 가을까지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나는 천상의 화원이다. 4월에도 눈이 내리는 고지대인 만큼 봄꽃 개화는 다른 지역보다 한 달 이상 느리다. 5월이 돼야 얼레지와 바람꽃 현호색과 산괴불주머니 등이 일대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만항재까지는 태백에서도 갈 수 있지만 정선 고한읍에서 연결된 도로를 이용하면 더 빠르다.
태백=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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