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이후 하루하루 시간을 그냥 허비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삶에서 재미를 찾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 분노를 표출하기도 합니다. 은퇴 후 삶은 어때야 하는 걸까요. <한국일보>는 우아하고 품격 있게 인생 2막을 살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격주 수요일에 연재합니다.
“나는 마녀예요. 대장 마녀.” (이은기)
“나는 남편역이죠. 조금은 바보 같은 역할이라고 해야 할까요.” (최중재)
두 얼굴이 긴장감으로 옅게 붉어졌다. 적잖은 설렘의 기운도 맴돌았다. 지난해 12월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연극배우 5개월차 이은기(69), 최중재(68)씨 얘기다.
둘은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마음 속 아직 못 열어 본 상자를 찾겠다”며 연극 세계에 뛰어들었다. 당시는 아마추어 연극인으로 데뷔를 고작 10일 앞둔 때였다. 이씨는 셰익스피어의 연극 ‘멕베스’ 속 대장 마녀, 최씨는 미국 극작가 닐 사이먼의 ‘굿 닥터’ 6개 에피소드 중 하나인 ‘유혹’에서 남편 역을 맡았다.
연습에 한창이었던 둘은 “극 중 하품하는 장면 하나를 궁리하느라 며칠 밤낮을 고민 중”이라며 웃었다. 연습실을 메운 20, 30대 청년들의 기운에 못지 않은 열정이었다. “제가 오랫동안 교직 생활을 해서 그런지 많은 사람 앞에서 하품하는 게 생각보다 진짜 쉽지 않아요.” 이씨가 고민을 털어놓자 최씨는 “저도 마찬가지죠”라며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같은 달 14일과 15일 ‘굿닥터’와 ‘멕베스’는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하루에 2회씩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다. 평생을 숨겨온 재능과 열정을 첫 무대에서 쏟아낸 둘은 이제 본격적으로 인생의 2막을 열고 있다.
긴장과 흥분 속에 초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3개월이 흐른 10일 전화 인터뷰에서 둘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흘렀다. “내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5대 1 경쟁률 뚫고 재수 끝에 입단
이씨와 최씨는 서울시극단이 매년 운영하는 시민연극교실의 11기 단원으로 배우의 꿈을 이뤘다. 시민연극교실은 연극에 입문하고 싶은 시민이 오디션을 거쳐 입단해 직접 극을 만들고 무대에 서는 프로그램이다. 배우 손숙, 연출가 손진택, 극작가 고연옥, 무대미술가 이태섭, 안무가 금배섭 등 걸출한 문화계 인사들이 강사로 나섰다. 11기 단원 중에는 20대 청년부터 이씨, 최씨와 같은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속해 있다.
이씨와 최씨는 둘 다 2017년에 은퇴했다. 이씨는 한 대학의 서양미술사학 교수로 재직했고, 최씨는 광고마케팅 업계에 수십 년을 몸담았다. 교수, 과장, 사장이라는 직함에 매여 살아 온 삶을 뒤로하고 인생 2막만큼은 다양한 감정과 표현 속에 살겠다고 다짐한 이들은 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시민연극교실에 입단했다. 이씨의 경우엔 2018년 한 차례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두 번째 도전 만에 성공했다.
내가 아닌 ‘다른 인생’을 표현하는 그 자체가 이들에겐 도전이었지만 녹록지 않은 인생 경험은 배역 소화에 도움이 됐다. 이씨는 주인공 멕베스를 파멸로 이끄는, 최씨는 자신의 아내를 유혹하는 친구를 돕는 역할을 무난히 연기했다.
이씨는 “나를 내려 놓고 제 3의 인물로 사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연극 배우로서의 자신을 돌아봤다. 최씨 역시 “대사 한 줄을 내뱉을 때도 신경질을 부리거나 화를 낼 수도, 툭 던질 수도 있어서 캐릭터 잡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젊은 동료 단원들과의 어울림도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씨는 “어쩌다 보니 내가 제일 연장자”라며 “주변을 둘러보니 윗사람이란 이유로 대접받으려고 들면 은퇴 후의 생활이 정말 고통스럽더라”고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했다. 자신이 전직 교수라는 것도, 손주가 여섯이나 있다는 것도 일부러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단원들과 벽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다.
최씨 역시 동료 단원들과 연습을 끝내고 맥주 한잔을 기울이는 등 젊은이들과 같은 위치에서 소통하려고 부단히 애썼다. 그는 “젊은 친구들과 격 없이 지낼 수 있는 나는 정말 복 받은 사람”이라고 젊은 동료들에게 고마워 했다.
◇잇단 암투병 겪고 비로소 찾은 행복
그런데 왜 하필 연극이었을까. 최씨는 퇴직 후 잇따라 대장암, 전립선암과 투병한 경험을 털어놨다. 건강을 위해 운동이나 여행을 해봤지만 좀처럼 즐겁지가 않았다고. 그러면서 우울증도 겹쳐 왔다. 그는 “우연히 ‘카르멘’이라는 연극을 보게 됐고 배우와의 포토타임에 문득 연극을 해 보고 싶단 생각이 들더라”며 “연극을 하면서 마음에 있는 여러 개의 상자 중 여태껏 열어보지 못한 상자를 찾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씨 역시 숨겨진 ‘또 다른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점을 연극의 가장 큰 묘미로 꼽았다. “학생들을 마주하고 강의를 해야 하는 직업이다 보니 사람이 감정적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표정을 되도록 안 짓는다든지, 톤이 일정해야 한다든지. 사회도 그런 걸 바라는 것 같았고. 가끔은 갑옷을 입은 것처럼 느껴졌다. 퇴직 후엔 무엇보다 내 감정을 해방시켜주고 싶었다.”
둘의 행보를 응원하는 가장 열렬한 관객은 가족이다. 이씨는 “삼남매가 모두 결혼해 손주가 벌써 6명인데, 특히 손녀 한 명은 연극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좋아한다”며 “한 번은 ‘할머니는 직업이 뭐야? 배우야 선생님이야?’ 하길래 깔깔 웃었던 기억이 있다”고 되새겼다. 최씨 역시 “연극을 하는 제 모습에 가족들은 처음엔 황당해 하는 것 같더니 최근엔 굉장히 재미있어 한다”며 쑥쓰러워했다.
◇다음 목표는 단편ㆍ독립영화 정식 데뷔
지난 연말 공연을 마친 이씨와 최씨는 다음 행보를 준비 중이다. 햇수로 따지면 어언 2년차 배우다. 최씨는 연기에 대한 욕심을 조금 더 키우고 있다. 최근엔 극단 월극쟁이와 함께 다음달 무대에 올릴 연극 ‘네 가지 사랑이야기’를 연습 중이다. 그는 “단편영화나 저예산 독립영화에도 출연해보고 싶다”면서 “포장되지 않고 날 것의 느낌을 줄 수 있는 작품들이면 더 좋겠다”고 했다. 이씨 역시 다시 무대에 서기 위해 적절한 기회를 엿보고 있다.
최씨는 연극 무대에 서는 동시에 시니어 모델로도 활동 중이다. 유명 디자이너나 지역 축제 속 패션쇼 무대에 지속적으로 오르고 있다. 그는 “대구에 있는 아들과 며느리가 쇼와 공연을 보러 매번 서울로 와 주니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껄껄 웃었다.
이들은 은퇴자뿐 아니라 모든 연령층이 연극을 접해 ‘손해보지 않는 삶’을 살길 바랐다. “나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도 그렇고 ‘당신은 이런 사람, 이걸 추구하고 저런 건 싫어하는 사람.’ 이렇게 남이 정해둔 틀 때문에 인생에 손해를 많이 본다. 생각해 보라. 나에겐 정말 다양한 감정과 정서, 탐구력이 있는데 너무 일부만 쓰고 있는 건 아닌지.” 이은기씨가 자신의 사례를 통해 들려준 이야기다. 최씨도 전적으로 동의하며 한 마디를 더 얹었다. “오늘이 즐거워야 내일이 즐거운 법이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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