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의 부담 적고 싱그러운 바질로 피자ㆍ파스타 훌륭한 마무리
고수의 독특한 향 낯설지만 적응되면 카프레제 등에 응용
감자 고소함 끝엔 향긋한 딜을, 단맛 위주 음식엔 민트의 상큼함을
지난 월요일, 올해의 첫 아이스커피를 내렸다. 그날의 낮 최고 기온은 17도, 안 마실 수 없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해 최대한 외출을 자제하는 사이에 여름이 봄을 한껏 밀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료를 찾아보니 지난 30년의 평년 온도는 12.2도, 약 5도 높다. 이렇다 보니 늦봄 혹은 초여름을 위해 진작부터 아껴 두었던 카드를 조금 일찍 꺼내기로 했다. 바로 계절에 맞는 음식 맛을 돋워주는 생허브 가이드이다.
일단 가장 중요한 사실부터 짚어보자. 생허브와 말린 것은 어떻게 다를까. 식재료는 수분이 빠지면 부피는 줄어들고 맛과 향은 농축된다. 허브도 예외가 아니라서 말린 것은 향이 훨씬 더 강렬한데, 대신 섬세함은 많이 부족하다. 건조의 과정을 거치며 가장 강한 향만 살아 남아 대표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때로 같은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강렬함의 차이가 커서, 통에 담긴 건조 허브는 코를 가져다 대기가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따라서 레시피에서 별도로 언급하지 않는 한 생허브의 자리에 말린 것을 쓰지 않는다. 특히 생선, 특히 살이 흰 종류처럼 섬세한 식재료라면 생허브가 없다고 마른 것을 쓴다면 재료를 압도해 요리 자체를 망쳐 버릴 수도 있다. 물론 어떻게든 먹을 수야 있겠지만 식재료가 꿈꾸었고 레시피가 제안한 맛은 전혀 아닐 거라는 말이다. 생허브를 말린 것으로 임의 대체하려는 시도는 대체로 무리이므로 깨끗이 접고 한국의 허브인 대파나 쪽파로 대체하는 편히 훨씬 바람직하다.
◇바질
허브에 익숙해지고 싶다면 일단 바질부터 선반에서 날름 집어 들자. 일단 기본 향 자체가 부담이 적은 데다가 풀의 느낌을 품고 있어 싱그럽다. 게다가 파스타나 피자를 비롯한 이탈리아 음식, 특히 만들기 쉬워 심리적 장벽이 낮은 카프레제 샐러드를 최종 완성하는 허브이기도 하다.
맞다, 이쯤에서 단단히 짚고 넘어가자면 카프레제 샐러드에 절대, 절대로 말린 바질을 쓰면 안 된다. 백지에 가까운 가운데 고소함만 살짝 배인 생모차렐라 치즈, 감칠맛과 신맛이 대개 썩 돋보이지 않는 토마토는 둘 다 연약한 식재료이다. 따라서 말린 바질이 가볍게 날린 잽마저도 카운터 펀치로 받아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생바질만이 유일한 선택이며 없다면 차라리 아무 허브도 쓰지 않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다. 차라리 올리브기름에 다진 마늘을 타지 않도록 볶아 맛을 들이는 등 아예 다른 각도에서 접근한다. 바질도 직접 키워 잎을 따서 먹을 수 있으나 웃자라지 않도록, 즉 옆으로 풍성해지도록 솎아 주는 등 관리를 조금은 해줘야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이탈리안 파슬리
깎은 채소와 함께 중국 요리의 널따란 접시를 장식했던 파슬리는 이파리가 꼬불거린다. 반면 이탈리아 파슬리는 잎이 납작해 ‘납작 잎 파슬리’라고도 불리며 향이 꼬불거리는 것보다 훨씬 더 짙다. 아무래도 ‘이탈리안’ 파슬리이다 보니 이탈리아 요리의 각종 소스 등에 많이 쓰이는데, 만들기 쉬운 페스토로 향을 만끽할 수 있다.
페스토는 ‘페이스트’, 즉 곤죽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이므로 모든 재료를 한데 넣고 갈아주는 것만으로 만들 수 있다. 대체로 바질이 페스토의 1번 허브이지만 우리는 흔하디 흔한(그리고 물론 맛있는) 깻잎으로 흔히 대체해 만든다.
그렇다면 파슬리가 안 될 것도 없고, 인터넷을 뒤져보면 실제로 레시피도 흔하다. 페스토에서 허브를 바꾸면 맛의 몸통을 이루는 견과류를 못 대체할 이유도 없으니, 비싼 잣 대신 호두를 써도 좋다. 허브, 견과류, 마늘, 간 파르미지아노 치즈, 소금, 올리브기름을 블렌더에 채우고 정말 곤죽이 될 때까지 잘 갈아준다. 피자, 파스타, 샌드위치 등에 양념으로 두루 쓸 수 있다.
◇고수
1998년, 미국에 처음 갔을 때 포(베트남 쌀국수)를 처음 먹어보았다. 맞다, 사실은 고수를 처음 먹어 보았다는 이야기이다. 당연히 큰 충격이었다. 세간에 널리 통하는 첫인상처럼 ‘비누향이 난다’고 느끼지는 않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괴상망측함(사실은 낯설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으니 익숙해지자 나는 순댓국의 부추나 해물탕의 쑥갓처럼 고수를 포에 말아 먹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안 맞는 것을 참고 먹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향이 독특한 식재료나 음식은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발효식품이 대표이지만 고수도 만만치는 않다.
물만 부으면 국물이든 국수 전체든 간단히 끼니가 해결되는 인스턴트 쌀국수가 완전히 자리 잡았으니 고수의 향에 익숙해졌다면 한 다발 갖춰 두는 것도 좋다. 아무래도 인스턴트 제품은 건더기도 적고 단출하지만 고수 잎 몇 쪽이 표정만큼은 좀 더 세심하게 바꿔 줄 수 있다.
한편 카프레제 샐러드에 바질이 이제는 좀 지루하다고 느낀다면 고수로 바꿔보자. 소량 쓰는 허브 하나를 바꿨을 뿐인데 절반쯤은 새로운 음식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특히 날씨가 본격적으로 더워져 바질로는 조금 약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구원 투수 노릇을 톡톡히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올리브, 가지, 병아리콩, 코티지나 페타치즈 등을 바탕으로 만든 소위 지중해풍의 샐러드, 살사나 과카몰리 같은 멕시코 음식에도 빠지면 섭섭하다.
이탈리안 파슬리와 고수는 바질보다는 작은 이파리가 다소 빽빽하게 달린 줄기를 다발로 모아 판다. 따라서 바질처럼 이파리를 하나하나 떼어 쓰려다가는 지쳐 식욕을 잃을 수도 있다. 게다가 잎이 얇아 손을 너무 많이 타면 거무죽죽하게 멍들어 음식과 만나기도 전에 향을 잃을 수도 있다.
다발 전체, 혹은 쓸 만큼만 나눠서 흐르는 물에 가볍게 씻은 뒤 물기를 털고 도마에 올린다. 그리고 칼을 날이 내 몸과 반대 방향으로 가도록, 즉 ‘백 핸드’로 잡고 살짝 눕혀 이탈리안 파슬리 혹은 고수를 훑는다. 적당한 크기로 썰려 나오는 이파리를 한데 모아 칼로 곱게 다지면 손쉽게 허브 쓸 준비를 마칠 수 있다.
◇딜
가늘고 곧고 하늘하늘한 이파리가 탐스럽게 모여 다발을 이루는 허브인 딜은 일단 두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오이 피클과 연어이다. 오이 피클을 담글 때 더해주거나 훈제 또는 염장 연어에 곁들여 먹는다. 혹 강원도에서 최근까지 판매했던 10㎏ 한 상자 5,000원의 감자를 손에 넣는데 성공했다면 딜에도 한 번 관심을 가져보자.
감자가 지닌 고소함의 끝에 향을 효과적으로 입혀 주니 드레싱에 더해 샐러드를 버무려준다. 단짝인 마요네즈만 쓰거나 가벼워지도록 요구르트나 사워크림을 적당히 섞어줘도 좋다. 딜 이파리 한 숟가락 정도로 마무리만 해준다.
◇로즈마리와 타임
‘스카이보로 박람회에 가본 적 있나요? / 파슬리, 세이지, 로즈마리와 타임.’ 영국의 옛 노래를 사이먼 앤 가펑클이 리메이크한 ‘스카이보로 페어’는 중세 시대에 요크셔의 스카보로에서 벌어진 45일짜리 대규모 박람회였다.
가사의 첫 줄이 읊듯 로즈마리와 타임은 대개 듀오로 맛의 들판을 함께 거닌다. 이파리가 아주 자잘하니 직접 먹기보다 음식에 향을 불어 넣는데 주로 쓴다. 풀보다 꽃에 더 가까운 향은 고기를 익히는 데 한두 줄기 슬며시 끼워 주는 것만으로도 마음껏 활개를 쳐 요리에 고급스러움을 불어 넣는다.
크게 구애 받지 않고 있는 걸 쓰거나 아예 둘을 섞어도 좋다. 다만 로즈마리는 닭, 타임은 소와 돼지고기에 좀 더 잘 어울린다는 점만 기억하자.
닭이라면 오븐 통구이를 할 때 뱃속에 레몬과 줄기 한두 대를 함께 채워준다. 돼지는 손가락으로 줄기를 훑어 떼어낸 이파리를 칼로 곱게 다진 뒤 소금과 후추로 간할 때 겉에 가볍게 입혀 지지거나 돈가스를 만든다. 마지막으로 쇠고기라면 닭과 비슷하게 스테이크를 굽는 팬에 통마늘과 함께 한두 줄기 던져 넣는다. 배어 나오는 쇠기름을 만나 신난다며 마음껏 향을 발산할 것이다.
◇민트
지금까지 살펴 본 허브가 대체로 짠맛 위주의 음식을 위한 것이라면 민트는 단맛 위주의 음식에 주로 쓰인다. 헤밍웨이의 칵테일이었다는 모히토나 남녀노소 구분 없이 열렬하게 사랑하는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을 생각해 보면 입지를 단박에 이해할 수 있다.
모히토는 복잡한 칵테일도 아니라서 프로 바텐더가 만드는 것만큼 훌륭할 수는 없지만 흉내라도 낼 줄 알면 손해 볼 것은 없다. 민트 잎 서너 장을 빻아 향을 끌어낸 뒤 럼 60㎖, 라임주스 20㎖, 설탕과 물을 동량으로 끓여 만든 시럽 15㎖에 얼음을 더해 잘 섞는다(럼, 라임주스, 설탕의 비율을 기억하면 양을 더 늘려 만들 수도 있다).
높은 잔에 담고 나머지를 탄산수로 채운다. 참으로 간단하지만 이마저도 딱히 시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마실 물에 레몬과 함께 민트 잎을 더하는 것만으로도 삶이 엄지 손톱만큼이나마 윤택해질 수 있다.
◇허브 보관 요령
허브는 연약하다. 매일 물을 갈아주면(이라고 쓰고 벌떡 일어나 꽃병의 물을 새로 채우고 돌아왔다. 정말 오랜만에 프리지아를 한 다발 샀다) 적어도 일주일은 바라볼 수 있는 꽃보다 더 빨리 시들어 버린다.
게다가 향이 말린 것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의미이지 절대 절대적으로 약하지 않다. 따라서 원래 소포장으로 팔더라도 처음 몇 장, 몇 줄기만 쓰고 잊고 있다가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군다나 허브는 특수 작물이다 보니 싼 편도 아니고 모든 마트에서 널어 놓고 팔지도 않는다. 결국 보관을 잘 해 사용 기한을 늘리는 게 최선이다.
일단 사온 상태 그대로 보관한다면 물기를 축인 키친타월로 가볍게 감싸서 밀폐봉투에 담아 냉장 보관한다. 이때 허브가 썩을 수 있으므로 물기는 머금되 수분은 없도록 섬세함을 발휘하자. 키친타월 자체를 물에 축인 뒤 짜기보다 분무기를 쓰는 게 조금 더 낫다. 이렇게 적어도 일주일은 멀쩡히 두고 쓸 수 있다.
한편 일단 쓰고 남은 것을 당장 쓸 일이 없다면 아예 다른 전략을 쓴다. 허브를 쓸 만큼 소분해 다지거나 채 썬 뒤 냉동고용 얼음틀에 담고 물을 부어 얼린다. 완전히 얼고 나면 틀에서 꺼내 밀폐봉투에 옮긴다. 이제 필요한 때마다 얼음을 녹여서 쓰면 된다. 맞다, 다진 마늘을 냉동 보관하는 요령과 흡사하다. 아무래도 냉동하기 전 만큼 신선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궁여지책이라고 말린 허브를 쓰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마지막으로 생허브를 키친타월에 감싸 전자레인지에 1~3분 돌리면 나만의 즉석 건조 허브를 만들어 쓸 수도 있다.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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