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재정부가 정부 내 서열 2위인 국무총리와 여당의 압박에도 ‘긴급 재난지원금 소득 하위 70% 기준’을 고수하려는 것은 재정건전성 사수에 대한 조직 특유의 뿌리 깊은 신념 때문이라는 분석이 강하다.
특히 재정건전성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옛 기획예산처 출신 인사들이 장관부터 고위직 전반을 장악하면서 기재부의 전체 입장을 대변하는 현상이 더 두드러졌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22일 정세균 국무총리가 ‘고소득자의 자발적 기부’를 전제로 여당이 주장하는 전국민 대상 재난지원금 지급안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고 밝혔지만, 기재부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국무총리가 행정부를 대표해 정치권에 중재안을 제시했지만, 기재부는 사실상 이에 호응하지 않은 셈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지금 국회에 제출된 추가경정예산(추경)안을 수정한다면 통과까지 더 많은 시간이 들 것”이라며 “정 총리의 발언과 관계없이 기존안(70% 지급) 유지가 기재부의 일관된 입장”이라고 말했다.
자칫 ‘항명’으로 비쳐질 수 있음에도 기재부가 입장을 바꾸지 않는 것은, 기재부가 재정건전성 악화 이슈에 특히 민감하기 때문이다. 전직 기재부 관료는 “기재부 공무원들은 자신들을 나라 곳간의 최후 보루로 여기고 있다”며 “재정건전성을 불필요하게 악화시키는 것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올해 경기 악화로 세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무작정 재정을 늘리기 어렵다는 현실론이 반영됐다는 분석도 있다. 또 다른 전직 경제부처 관료는 “일본도 세수가 줄어드는 버블 경제 상황에서 경제를 살리기 위해 무리하게 돈을 풀다 국가채무비율이 200%를 넘게 됐다”며 “현재 기재부 관료들은 우리도 일본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는 듯 하다”고 분석했다.
반면 한편에선, 나라 경제 전반의 상황을 살피며 재정을 운용해야 할 기재부가 재정건전성을 유난히 강조하는 ‘예산실’ 위주의 시각으로 불필요한 고집을 피우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현재 홍 부총리를 비롯해 총 9명의 기재부 1급 고위 공무원 중 6명이 예산을 관장하던 옛 기획예산처 출신이다. 이 때문에 기재부가 재정건전성 악화 이슈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시각도 있다.
여당의 주장대로 전국민에게 재난 지원금을 주더라도 현재 제출된 추경안에서 3조원 정도의 추가 재원만 마련하면 되는데, 이는 재정건전성 악화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수준이라는 평가도 있다. 실제 3조원의 적자국채를 발행한다고 하더라도 국가채무비율은 41.35%로 0.15%포인트 늘어나는 수준에 그친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우리나라 국가채무비율은 40%대로 재정을 보수적으로 운용하는 독일에 비해서도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며 “3조원의 추가 적자국채 발행 때문에 국가 재정도가 크게 악화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세종=민재용 기자 insigh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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