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자박 소읍탐방] 영동군 황간면
‘마음은 날아가는데 기차는 자꾸 기어가고.’ 경북 김천에서 충북 영동 사이, 황간역은 힘겹게 추풍령을 넘어온 열차가 잠시 쉬어가는 곳이다. 승객 드문 역사(驛舍)에 향수 짙은 시가 주인이다. 정완영(1919 ~ 2016) 시인의 ‘외갓집 가는 날’을 비롯해 지역 문인들의 시 작품이 가득하다. 역 광장과 승강장에 놓인 옹기마다 고향과 옛 추억을 소환하는 시구가 장식돼 있다.
◇황간역 항아리마다 향수 짙은 시어(詩語)
황간역은 1905년 경부선 개통과 함께 문을 열어 115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소실됐다가 6년 뒤 복구했다. 석탄 수송용 화물열차가 정차하는 큰 역이었지만, 지금은 하루에 무궁화호 15편(상행 7편, 하행 8편)이 정차하는 한적한 역이다.
현재 황간역은 문화공간으로 변신해 관광객을 맞고 있다. 1층 대합실 한 켠에 작은 갤러리가 있다. 단출하지만 청기와로 멋을 더한 옛 역사 모형과 함께, 상촌면 화가 황의봉의 ‘주름 사이에 보이는 삶’ 작품이 전시돼 있다. 억지 웃음 없이 증명사진을 찍듯 담담한 표정과 마주한다. 인생은 마냥 즐겁지도, 그렇다고 나쁜 일로만 가득한 것도 아니다. 전시장 벽면의 얼굴 표정은 그 중간 어디쯤일 것 같다. 역 2층은 자율 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5월에는 ‘외갓집 가는 길 동시 그림전’이 예정돼 있다.
역 광장 옹기에 쓰인 다양한 시를 한 가지 주제로 묶는다면 ‘느림’이다. 정지용의‘향수’에 나오는 얼룩배기 황소가 되새김질하듯 묵은 추억들을 찬찬히 곱씹는다. 신작로, 오디, 보리밭, 노인, 폐가, 안경알, 메뚜기, 간이역…. 볼록한 항아리 배에 새겨진 이런 시어들이 풍성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허영자 ‘완행열차’).
황간은 그래서 아련한 유연의 기억을 따라 가는 여행지다. 역에서 하천(초강천)을 건너면 읍내다. 면 소재지이니 굳이 따지면 읍내라 할 수는 없고 규모도 작다. 그래도 일직선 좁은 도로를 따라 제법 길게 상가가 형성돼 있고 장터까지 있으니, 시골마을이라 하기에도 애매하다. 대형쇼핑몰이나 프랜차이즈 커피숍은 없지만, 식당과 미장원, 철물점 등 일상에서 필요한 가게는 두루 갖췄다. 다양한 음식점 중에서도 가장 흔한 건 ‘올뱅이’ 식당이다. 역 주변과 장터까지 이름난 식당의 주요 메뉴는 대부분 올뱅이다. 올뱅이는 다슬기의 이 지역 사투리다.
황간의 지형 역시 한마디로 규정하기엔 애매하다. 산은 높은데 위압적이지 않고 들은 좁은데 여유롭다. 추풍령에서 멀지 않으니 험준할 것 같지만, 해발고도는 200m가 조금 넘는다. 읍내 동편 남성근린공원에 오르면 푸근한 지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언덕 끝자락 추풍령을 바라보는 위치에 누대(가학루)와 향교가 자리 잡고 있다. 모두 조선 전기에 세웠으니 황간의 역사를 짐작해볼 수 있는 유적이다.
읍내에서 약 2km 떨어진 월류봉(月留峰)은 황간면에서 경치가 가장 빼어난 곳이다. 초강천 뒤편으로 6개 봉우리가 우뚝 솟았다. 절벽은 가파르지만 능선은 부드럽다. 달이 머무는 봉우리라는 뜻인데, 얼핏 화투장의 팔공산 그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단정하다. 맑은 수면에 초록 봉우리가 비치고, 물이 휘어진 곳에 형성된 모래사장은 유난히 희다. 그 산자락 강 자락 따라 멀어지는 봄 풍경이 또 아련한 옛 고향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월류봉을 중심으로 일대를 한천팔경이라고도 부른다. 봉우리 건너편 마을 언덕에 우암 송시열(1607~1689)이 후학을 가르치고 학문을 익히며 머물렀던 작은 집이 있는데, 이름이 한천정사(寒泉精舍)다. 애초에는 서원이었지만 고종 때 서원 철폐령으로 사라진 것을 1910년 다시 지었다. 대문 앞에 펼쳐지는 풍광만 보면 세상과 담을 쌓고 오로지 글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젊은 유생들이 월류봉과 초강천을 오르내리는 달빛의 유혹은 어떻게 뿌리쳤을까 싶다.
월류봉은 초강천과 석천 두 개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다. 초강천을 거슬러 오르면 황간면 소재지이고, 석천 물줄기를 따라가면 반야사에 닿는다. 석천을 따라 반야사까지 도로와 걷기 길이 조성돼 있다. 관광지의 번잡함을 벗어나 한적한 강 마을 풍광을 만끽하기 그만이다.
◇쌍굴다리에 깊게 파인 전쟁의 상처
경상도와 충청도의 길목인 황간 역시 한국전쟁의 비극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노근리 경부선 쌍굴다리 교각에 당시 미군이 쏜 총탄 자국이 무수히 남아 있다. 단단한 콘크리트에 깊게 파인 자국마다 하얀 페인트로 표시를 해놓았다. 적군이 아니라 믿고 의지했던 아군에 의한 희생이라 마음의 상처는 더 깊다.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은 미군 제1기병사단 예하 부대가 이곳 경부선 철로와 쌍굴다리에서 비행기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250~300명의 피란민을 학살한 참극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이 지난 1950년 7월 25일에서 29일 사이에 벌어진 사건이다. 미군 측은 피난민 속에 북한군이 잠입했다고 오인해 빚어진 일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미군의 소개령에 따라 짐 보따리를 싸서 피란길에 올랐던 주민들이 바로 그 미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고,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유족들은 또 수십 년 간 억울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노근리 쌍굴다리는 1934년 경부선 철도용 다리로 건축된 아치형 교각이다. 1999년 철도청이 다리 내부에 콘크리트를 덧씌우는 보강 공사를 하면서 총탄 자국이 많이 훼손됐지만, 2003년 문화재청에서 등록문화재(59호)로 지정해 지금의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다. 현재 굴 한쪽은 도로로 이용되고, 다른 쪽에는 작은 하천(개근천)이 흐른다. 쌍굴 위로는 여전히 경부선 열차가 달리고 있다.
노근리의 진실은 사건이 발생한 지 40년이 훌쩍 지난 후에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4년 희생자 유족들이 대책위원회를 꾸렸고, 1998년에는 AP통신을 비롯한 국내외 언론의 취재로 진상이 차츰 밝혀지게 된다. 피해자와 유족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2004년에는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노근리 사건 특별법’이 제정됐고, 후속 조치로 2011년 쌍굴다리 인근에 노근리 평화공원이 준공됐다.
평화공원은 노근리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평화와 인권 교육장으로 활용할 평화기념관과 교육관을 중심으로 꾸며졌다. 위령탑 주변으로 사건의 본질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조각 작품을 배치했고, 평화기원마당은 휴식과 소풍 장소로 꾸몄다. 꽃잔디와 장미를 비롯한 다양한 수목이 계절을 바꿔가며 화사하게 피어난다. 70년의 전 참극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전쟁 없는 평화로운 한때를 누리기 좋은 곳이다. 노근리는 ‘녹은(鹿隱)’에서 유래한 지명이라 한다. 사슴이 뛰어 노는 평화의 땅이다.
영동=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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