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실이라 하면 치열한 궁중암투만 떠올리시나요. 조선의 왕과 왕비 등도 여러분처럼 각자의 취향에 따라 한 곳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사들이 그간 쉽게 접하지 못했던 왕실 인물들의 취미와 관심거리, 이를 둘러싼 역사적 비화를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마다 소개합니다.
<17> 불꽃놀이
해마다 10월이면 열리는 불꽃축제를 구경하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여의도 한강 인근으로 몰려든다.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는 불꽃들의 향연을 보면서 사람들은 잠시나마 현실 세계를 떠나 신비로운 동화 속 세계에 온 듯한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조선왕실에서는 불꽃놀이를 말할 때 ‘관화(觀火)’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였는데, 까만 밤하늘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불꽃들을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화희(火戲)’, ‘관방포화(觀放砲火)’, ‘화산붕(火山棚)’, ‘화산대(火山臺)’, ‘매화(埋火)’ 등도 불꽃놀이를 뜻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불꽃놀이는 그저 바라보면서 즐기는 현대의 불꽃놀이와는 조금 다른 의미가 있다. 조선 전기에 행해진 불꽃놀이는 군무(軍務)를 익히기 위해서, 또는 연말에 액운을 쫓기 위해 행했던 계동나례(季冬儺禮) 등의 행사와 함께 베풀어지기도 하였다. 화약이 터지면서 발생하는 엄청난 소리와 강렬한 불꽃의 힘으로 나쁜 기운을 떨쳐버리고자 함이었다.
조선시대의 불꽃놀이 풍경은 어떠했을까? 조선시대 문인 중 몇몇은 자신들이 직접 보았던 불꽃놀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를 통해 당시 불꽃놀이의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조선 초기의 학자 성현(成俔ㆍ1439~1504)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불꽃놀이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였다. “두꺼운 종이로 포통(砲筒)을 겹으로 싸고 그 속에 석류황, 반묘(班猫), 유회(柳灰) 등을 넣어 단단히 막고 이를 다진다. 그 끝에 불을 붙이면 조금 있다가 연기가 나고 불이 번쩍하면서 통과하면 종이가 모두 터지는데 소리가 천지를 흔든다. 시작할 때에 수많은 불화살(火矢)을 동원산(東遠山)에 묻어놓아 불을 붙이면 수많은 화살이 하늘로 튀어 오른다. 터질 때마다 소리가 나고 그 모양은 마치 유성(流星)과 같아서 온 하늘이 환하다.”
성현과 동시대의 학자인 서거정(徐居正ㆍ1420~1488) 또한 당시 궁궐에서 보았던 불꽃놀이의 감흥을 시로써 생생하게 담아냈다.
“좋은 밤 어원에서 불꽃놀이 구경하노라니/ 온갖 놀이 다 바쳐라 기세도 웅장하구려/ (중략) 때로는 포도가 달리는 형상을 짓기도 하며/ 긴 밤을 온통 빨간 철쭉꽃 밭으로 만드누나/ 붉게 떠오른 신기루대는 보일락 말락 하고/ 번갯불은 천지 사이를 빨갛게 횡행할 제/ 자리 가득한 오랑캐들이 모두 경악하여라/ 태평성대의 위령을 진작 보지 못했음일세”
조선 초기에는 외국 사신을 위한 행사로써 종종 불꽃놀이를 행하였다. 서거정의 시 끝부분에 표현된 불꽃놀이를 본 외국 사신들의 반응은 정종~세조대 실록에서도 확인된다. 유구국, 왜인, 중국 등 주변국 사신들에게 불꽃놀이를 보여줌으로써 자연스럽게 화약과 관련된 조선의 기술력을 과시하였고, 국가의 위엄을 나타냈다. 조선은 당시 최첨단 기술이었던 화약제조 기술의 보유로 주변국과의 외교 관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불꽃놀이는 조선시대에 화약, 병기, 군진에서 쓰는 의장 등의 제조를 맡았던 군기감(軍器監)에서 담당하였다. 중종 연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 “최해산(崔海山ㆍ1380~1443)이 군기감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화약이 겨우 6근 4냥뿐이었으나 지금은 6,980근 9냥”이라 하여 태조 초기에 군기감에 비축되어 있던 화약의 양이 얼마 되지 않았으나 이후 생산량이 대폭 증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최해산이 군기감에서 화약제조 전문 장인을 집중적으로 양성하는 등의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려 말 화약제조법을 찾아낸 최무선(崔茂宣ㆍ1325~1395)의 아들로서 조선 초기 화약과 화포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최해산은 군기감에서 불꽃놀이를 담당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그가 불꽃놀이에 관한 일을 총괄하고 있었음을 태종 11년(1411년) 1월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최해산이 제야(除夜)에 불꽃놀이(火戲)를 할 때, 자신이 몸소 살피지 아니하여 군중을 놀라게 하였으므로, 죄가 장(杖) 1백 대에 해당되었으나, 명하여 최해산을 용서하고….”
조선의 여러 국왕들이 불꽃놀이를 행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성종(成宗ㆍ재위 1469~1494)의 불꽃놀이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성종 재위기에는 화약제조 기술력과 화약의 공급이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 불꽃놀이와 같은 행사를 치르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성종 8년(1477년) 12월 화약장(火藥匠)이 죽고 다치는 사고가 벌어지자 신하들과 불꽃놀이의 중지에 대해 논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때 대사헌 이계손(李繼孫)이 “후원(後苑)의 관화는 곧 놀이(戲玩)하는 일이니,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물며 지금 사람이 많이 죽은 것은 큰 변괴이니, 청컨대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군무(軍務)에 관계되는 일인데, 놀이라고 해도 되겠는가? 만약에 놀이를 하려고 한다면, 어찌 다른 놀이가 없어서 꼭 화희(火戲)를 하려고 하겠는가? 내가 지금 정지하고자 하는 것은 다만 사람이 죽어서일 뿐이다. 이것을 놀이라고 지적해서 정지하도록 청하는 것이 옳은가?” 하니, 이계손이 아뢰기를, “화산대(火山臺)는 적을 막는 기구가 아닌데, 어찌 꼭 급급(急急)한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신하들은 불꽃놀이가 비용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단지 놀이에 가까워 폐지하자고 하였지만, 성종은 불꽃놀이가 군무(軍務)에 관계되는 중요한 일이라며 들어주지 않았다. 이후 성종 연간의 기록에는 연말인 12월 30일에 불꽃놀이 했다는 기록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성종 21년(1490년), 신하들이 또다시 불꽃놀이가 유희에 가까운 소모적인 일임을 들어 중지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이때에도 성종은 그런 점을 인정하면서도 군대와 나라의 중한 일이자 두 대비를 위해 사귀(邪鬼)를 쫓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들어 불꽃놀이를 강행하였다. 이후 성종 22년(1491년), 성종 24년(1493년)에도 신하들이 지속적으로 불꽃놀이의 중지를 건의하였지만 성종은 들어주지 않았다.
화약이 비교적 많이 소모되는 대규모 불꽃놀이는 조선 전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성종대에 정점을 이루었던 것 같다. 이후 중종~명종대에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경회루 행사 등에서 불꽃놀이가 있었으나 이후의 기록에서 더 이상 불꽃놀이 관련 내용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조선 전기에 성행했던 불꽃놀이는 대량의 화약 소모에 따른 비용 부담과 함께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때로는 큰 인명 피해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이 점차 성리학적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감에 따라 연말에 잡귀를 쫓기 위해 행해졌던 나례(儺禮)와 불꽃놀이 등의 행사는 점차 축소되거나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조선왕실에서는 불꽃놀이와 같은 의미로 ‘매화(埋火)’, ‘매화포(埋火砲)’ 등의 용어들이 나타나는데, 조선 전기의 대규모 불꽃놀이와는 조금 다른 방식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매화(埋火)’는 ‘화성능행도병풍(華城陵行圖屛風’에 구체적인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1795년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정조(正祖ㆍ재위 1776~1800)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탄신 60주년이자 어머니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회갑을 맞아 화성행궁(華城行宮)에 행차한다.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에 제사 지내고 행궁에서 어머니의 회갑연 등 여러 행사들을 치렀다. 당시 행사의 주요 장면을 그린 것이 ‘화성능행도병풍’이다. 8폭의 그림 중에서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는 득중정(得中亭)에서 정조가 활쏘기를 한 후, 어머니와 함께 불꽃놀이를 즐겼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림의 중하단에 땅에서 붉은 화염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매화(埋火)’의 모습이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매화포 주변에는 신기한 듯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들은 평소에 좀처럼 보기 어려운 불꽃놀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그 순간을 즐거워하고 있는 것 같다. 조선 전기에 왕실을 중심으로 행해진 불꽃놀이는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점차 저변화되었고,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하나의 놀이가 되었다.
백은경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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