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n번방 방지법’ 사각지대
플랫폼 기업에 ‘불법 콘텐츠 방지 의무’
외국업체 위반 땐 징역ㆍ벌금 부과 어려워
네이버ㆍ카카오 등 국내 기업만 겹겹 규제
정부와 국회가 국내 인터넷 기업을 각종 규제로 꽁꽁 싸매며 공회전하는 동안, ‘제2의 갓갓’과 ‘제2의 박사’들은 보란 듯이 정부 손길이 미치지 않는 해외 서비스로 더 깊이 숨어들고 있다. 지난달 20일 ‘n번방 방지법’으로 불리는 디지털 성착취 범죄 관련 법안들이 압도적인 표차로 국회를 통과했지만, 실질적으로 해외 서비스에서 이루어지는 불법 행위는 직접 단속할 방법이 없어 보여주기식 법안 통과였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31일 업계에 따르면 n번방 방지법으로 불리는 개정 전기통신사업법 및 정보통신망법은 인터넷 플랫폼 사업자의 ‘불법콘텐츠 유통 방지’ 의무를 강화했다. 네이버나 구글과 같은 플랫폼 기업이 자체적으로 불법 콘텐츠를 발견해 삭제하도록 ‘기술적 조치 의무’를 부여하는 게 골자다. 이를 어긴 사업자에 대해서는 3년 이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됐다.
문제는 n번방 방지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더라도 텔레그램과 같은 해외 인터넷 서비스 속에서 발생하는 범죄는 깨끗이 솎아내기 어렵다는 데 있다. 러시아 출신 형제가 2013년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만든 텔레그램은 수 년에 한 번씩 본사 서버를 옮겨 다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때문에 범죄가 발생하더라도 국제공조를 바라기 어렵다. 한국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긴 하지만, 국내에 지사나 대리인이 없어 강제력을 행사할 대상이 마땅치 않은 것도 문제다. 업계 관계자는 “제2의 n번방 사태가 텔레그램에서 다시 발생하면, 누구에게 징역형을 내리고 어떤 사업체에 벌금을 부과할 수 있겠나”라며 “광고조차 걸지 않는 텔레그램은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게임 채팅앱 ‘디스코드’나 텔레그램보다 더욱 보안이 뛰어난 메신저로 알려진 ‘시크릿’, ‘위커’, ‘와이어’ 등에서도 n번방과 비슷한 사례가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범죄자들이 ‘익명성’을 보장하는 해외 채팅 앱으로 범죄가 계속 숨어들고 있는 것이다. 올해 4월에는 디스코드에서 성착취 영상을 유포한 채널 운영자 10명이 검거됐는데, 이 중에는 만12세 청소년도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줬다.
실제로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방송통신심의원회로부터 제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6년부터 2020년 2월까지 방심위가 심의한 디지털성범죄물 8만5,818건 중 해외 플랫폼이 자체적으로 삭제한 것은 32%에 불과한 2만7,159건에 불과했다. 이에 방심위는 자율규제가 이뤄지지 않은 나머지 68%의 게시물에 대해 통신망사업자들을 통해 해당 콘텐츠에 접속을 하지 못하도록 아예 길을 끊어버리는 ‘접속차단’ 조치를 취했지만, 이마저도 보안프로토콜(https)나 우회 프로그램 때문에 단속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정부가 해당 개정안 적용 범위를 ‘공개된 온라인 공간’으로 한정하면서 오히려 범죄자들이 더 추적이 힘든 해외 서비스로 숨어드는 부작용이 발생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말로 n번방 사태 재발을 100% 방지하고 싶다면 국내든 해외든 모든 대화 내용과 오고 가는 파일 내용을 다 들여다봐야 하는데, 정부에서는 개인사찰 논란을 의식해 공개된 공간만을 대상으로 단속하겠다고 한다”며 “범죄자들이 공개된 공간을 찾아가 일을 벌이지 않는 한 결국 엉뚱한 대상만 규제하게 되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KISO) 등을 통해 자율적으로 강도 높은 음란물 유통 방지책을 고안하고 정보통신망법상 책임을 지고 있던 네이버와 카카오 등 국내 업체들은 이번 법이 중복 규제이자 역차별이라고 지적한다. 해외 기업에는 제대로 적용하지 못할 규제를 겹겹이 만들어 결과적으로 국내 기업들의 손발만 묶어놓고 있다는 불만이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인터넷 기업들은 KISO를 비롯해 관련 정부 부처와 지속적인 협업을 하면서 서비스 품질을 관리하고 있고, 이는 글로벌 모범 사례 중 하나로 손꼽힐 정도”라며 “자꾸 플랫폼 기업에 대한 의무 강화와 처벌 수위를 높여가고 있는데, 이는 결국 국내 사업자에 대한 규제 수위만 높이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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