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원 사진작가 인터뷰
“일제의 경제적 침략의 실증을 기록한다는 생각으로 촬영에 임했습니다.”
전재원(56) 사진작가는 지난 20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서울의 남아 있는 적산가옥 촬영 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적산가옥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해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정부에 귀속되었다가 일반에 불하된 일본인 소유의 주택을 말한다. 표현상 주택을 의미하지만 전 작가는 과거 도로변 건물의 2층 이상의 상가를 언론이나 사회 통념이 적산가옥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을 들어 적산가옥으로 표현했다.
촬영 시작은 2013년 9월부터다. 일제에 의해 부설된 철도와 도로를 따라 세워진 적산가옥이 대상이었다. 이 도로변들은 재개발로 인해 적산가옥이 사라지고 고층빌딩이 들어서고 있는 추세여서 다 사라지기 전에 기록을 남겨 놓아야겠다는 마음이 급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게 됐다.
세 축으로 나눴다. 영등포~노량진ㆍ장승배기~용산~남영동 일대~서울역~시청~종로ㆍ명동ㆍ을지로~동대문~청량리~회기동이 한 축이다. 다른 축은 서울역~통일로~홍제동~불광동~구파발, 또 다른 축은 서울역~충정로~아현동~신촌일대~수색동 일대다. 2013년 9월부터 2014년 2월까지는 영등포에서 회기동까지 직접 걸으며 작업했다. 이후 서울 25개 자치구의 관공서와 랜드마크 등을 상세하기 기록할 필요성을 느껴 그 작업을 하면서 틈틈이 적산가옥을 촬영하고 있다.
전 작가는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했다. 사진은 부전공. 월간지와 여러 잡지에서 편집기자로 일했던 그는 “편집자 특유의 예리한 감각으로 적산가옥의 역사적 의미를 카메라 앵글에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리모델링을 통해 식당으로 운영돼 시민들은 잘 모르지만 의외로 주변에 적산가옥이 많다”며 “오랫동안 촬영하다 보니 건축 양식의 특징이 눈에 익어 딱 보면 적산가옥 여부를 알 수 있게 됐다”고 엷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실제 전 작가가 찍은 사진을 보면 도심에서 시민들이 들르는 식당과 빵집, 병원 등 웬만한 상업시설이 적산가옥에 입점해 있다. 전 작가는 을지로ㆍ명동ㆍ충무로 건물의 60~70%는 적산가옥이라고도 추정하고 있다. 그는 “리모델링이 이뤄졌거나 페인트칠이 더해진 건물을 제외한 적산가옥의 원형을 최대한 보존한 건물 위주로 촬영했다”고 밝혔다.
촬영된 적산가옥은 2층 이상의 콘크리트 철골 구조 상가 건물이다. 다닥다닥 붙어 있으며 좌우 대칭에 근엄한 형태다. 을지로3가 재개발과 관련해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평양냉면 맛집인 을지면옥도 적산가옥이다.
전 작가는 전면이 좁고 측면이 넓은 특징과 그 이유를 알려줬다. 당시 조선인 중심의 북촌상권에 대항하기 위해 일제는 충무로ㆍ명동ㆍ을지로 상권을 키우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를 위해서는 본토에서 많은 사람들을 유입시켜야 했다. 하지만 신흥 상권의 임대료가 비싼 까닭에 건물의 종축이 길고 넓어지도록 설계해 최대한 많은 인원을 받아들인 결과라는 거다.
본토에서 건너온 민간인들은 적산가옥을 세우고 다양한 상업 활동에 종사하면서 한반도가 그들의 경제 속국이 되는 걸 꿈꿨을 것이다. 그런 꿈을 상징하는 게 건물 구조다. 적산가옥은 철골 구조로 200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하다고 한다. 전 작가는 “200년이 지나도 한반도가 여전히 자신의 속국일 것이라는 못된 생각을 깔고 지은 것이지요”라고 한탄하듯 말했다.
그는 종로 1ㆍ2가처럼 재개발로 적산가옥이 사라져 옛 모습을 잃은 곳들을 이미 촬영한 사진과 비교하는 작업을 계획 중이다. 올해 초에는 적산가옥 사진 800여점과 서울 25개구를 촬영한 사진 등 5만8,000여점을 한 통신사에 아카이브 형태로 제공했다. 그는 “앞으로도 적산가옥과 해안가 작은 어촌 풍경과 같은 사라지는 것들을 기록하는데 평생 매진하고 싶다”고 의지를 다졌다.
배성재 기자 passi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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