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영(欽英)’은 조선 후기 영ㆍ정조 연간에 서른 네 해 짧은 생을 살다 간 선비, 유만주(1755~1788)가 남긴 일기다. 그의 생애는 평범했다. 일생 과거에 응시했으나 줄창 낙방해서 면이 서지 않았고, 별다른 직분을 맡은 적 없고, 남들이 기릴 만한 업적도 없이 요절했다. 다만 그의 일기는 특별하다. 스물한 살 되던 해부터 세상 떠나기 직전까지 13년 간 거의 빠짐없이 써내려 간 일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았다. “나의 글, 시, 말, 포부가 전부 흠영에 있다”며 “흠영이 없으면 나도 없다”고 스스로 썼다.
일기에 그토록 공을 들인 이유가 사뭇 장엄하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하루라는 시간과, 하루는 한 달과, 한 달은 한 해와 이어져 있다. 이렇게 일기를 씀으로써 저 하늘이 나에게 정해준 목숨을 끝까지 남김 없이 가며 하나도 폐기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단 하루도 허투루 살지 않겠다는 결연함이 느껴진다.
‘일기를 쓰다’는 ‘흠영’의 글을 골라 엮은 두 권짜리 선집이다. 1권은 인간 유만주의 내면을 보여주는 글, 2권은 그가 살다간 18세기 조선의 시대상을 전하는 글을 모았다.
200년도 훨씬 전 인물의 일기인데도 공감할 대목이 많은 것은 유만주라는 개인의 숨결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뜻은 높되 의지는 약했고,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 학식은 높았으나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자연히 위축됐을 터, 일기 곳곳에 나타나는 열패감과 자괴감이 몹시 쓰라리다.
나이는 먹어가는데 이룬 게 없다고 한탄하며 초조해할 때는 자기연민이 지나쳐 자기비하에 이른다. “겉으로는 고상하고 빛나며 맑고 준엄한 것 같지만, 내실은 둔하고 나약하며 속이 텅 비고 엉성하다. 이런 점에서 온 나라에 너와 맞먹을 자 누구겠는가” “재주도 없고 덕도 없는 서툴고 허술한 젊은이”라고 썼다.
세상이 몰라줬을 뿐이지 별 볼일 없는 청춘은 결코 아니었다. 수 천 권의 책을 읽은 독서가요, 비록 완성작을 내놓진 못했으나 거질(巨帙) 역사책을 준비하던 재야 역사가로서, 자신의 지적 편력과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일기에 상술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주제별로 분류한 장서각, 고금의 역사를 총정리한 통사와 인물 열전 등을 꿈꿨고 구체적 구상을 밝혔다. 그러나 현실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괴리를 퇴영적 몽상이 채웠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향으로 살기 좋고 물산 풍부하고 아무 걱정 없이 책 읽고 글 쓰면서 살 수 있는 곳을 그리기도 했다.
요샛말로 치면 루저 혹은 잉여의 기록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깎아 내리기엔 이 일기가 거느린 품격과 깊이가 도저하다. 빼어난 문학이고 지적 사색인 동시에 당대의 증언이기도 하다. 영ㆍ정조 시절은 흔히 문예부흥기로 알려져 있지만, 유만주가 ‘흠영’에서 전하는 실상은 다르다. 굶주리다 못해 사람 잡아 먹고, ‘유전무죄 무전유죄’에다 매관매직이 판을 치고, 신분 차별에 찌그러져가던 나라가 그때 조선이다. 개인의 일기지만, 중요한 사료로서 값진 기록이다.
‘흠영’이 한글로 번역된 것은 이번 선집이 처음이다. ‘흠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하라(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씨가 편역했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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