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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의 자승자박

입력
2015.01.29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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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동네북 신세다. 야당 말이다. 사력을 다해도 증세 당위론이 먹힐지 불확실한 판에 되레 조세 저항을 부추기면서 복지는 무슨 복지냔 게 진보 측 비판이다. 보수 측은 증세안을 함께 통과시켜 놓고 무슨 자격으로 욕하냐며 비아냥댄다. 무시당해온 게 서러워 꺼내든 고육책이었겠지만 드러난 건 새삼스런 무능뿐이다. 사진은 22일 국회에서 열린 정책조정회의에서 정부의 세제 정책을 비판 중인 새정치민주연합 문희상(왼쪽 세 번째) 비상대책위원장. 오대근기자 inliner@hk.co.kr
다시 동네북 신세다. 야당 말이다. 사력을 다해도 증세 당위론이 먹힐지 불확실한 판에 되레 조세 저항을 부추기면서 복지는 무슨 복지냔 게 진보 측 비판이다. 보수 측은 증세안을 함께 통과시켜 놓고 무슨 자격으로 욕하냐며 비아냥댄다. 무시당해온 게 서러워 꺼내든 고육책이었겠지만 드러난 건 새삼스런 무능뿐이다. 사진은 22일 국회에서 열린 정책조정회의에서 정부의 세제 정책을 비판 중인 새정치민주연합 문희상(왼쪽 세 번째) 비상대책위원장. 오대근기자 inliner@hk.co.kr

자충수를 뒀다. 진영 논리에 갇혀서다. 증세는 옳았다. 하지만 나쁜 정권이다. 딜레마였다. 범죄로 몰았다. 공범을 자처했다. 복지는 정략에 희생됐다. 대체 뭘 위해 야당은 반대하나.

“요즘 사람들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놀라고 있다. 박 대통령의 무능 때문이 아니다. (…) 박근혜는 증세 없는 복지라는 모순된 목표를 설정했다. 연말정산이라는 잘못된 수단을 동원했다. (…) 졸속적인 연말정산 항목 수정, 소급적용 등 종잡지 못하는 집권세력의 서툰 일솜씨는 불편하긴 해도 놀랍지는 않다. 그의 지지율이 그의 실력과 업적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현실에도 시민들은 익숙해져 있다. 국정이 망가져도 의연하고,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그만두는 법을 모르는 박근혜다운 태도에도 서서히 적응해가고 있다. 그런데 이 익숙함을 깨는 일이 발생했다. 하나의 정책이 실패하자 실패에 합당한 지지율이 나타나고 박근혜가 신속하게 반응한 것이다. (…) 이건 말할 것도 없이 세금 문제의 특수성 때문이다. 한국인은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다. (…) 소득이 적다고 안 내고 소득이 많아도 더 내지 않는다. 이런 현실에서 연말정산을 증세 수단으로 삼은 정부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과는 별개로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전환하면서 누진과세 원칙을 세운 건 평가해줘야 한다. 복지국가를 추구하는 정당이라면 누진과제의 의미를 살려 증세 확대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권에 대한 공세를 우선했고, 그걸 위해 ‘13월의 세금폭탄’이라는 치명적 무기를 꺼냈다. 부자 증세 안 했으니 중산층·서민 증세도 안된다며 조세 저항을 부추기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무기력했던 새정치연합은 그동안 박근혜 정권을 제대로 견제할 능력이 없었고 그 때문에 무시당해왔다. (…) 정정당당하게 증세의 수단을 쓰지 않고 연말정산 개편으로 세수를 늘리는 정부를 궁지로 모는 것은 일도 아니다. 고소득층 편드는 세력은 부자 증세라고, 중산층·서민편이라는 세력은 직장인의 투명 지갑 털기라고 협공하면 견뎌낼 정부가 없다. (…) 박근혜 추락은 야당의 힘 때문이 아니다. 조세 저항에 편승하고, 부자와 세금동맹을 맺은 결과다. 야당이 보탠 게 있다면 집권 때 세금폭탄론의 피해자였으면서도 오히려 앞장섬으로써 세금폭탄론의 명분을 강화해준 것이다. 한마디로 잠자던 조세 저항 심리를 흔들어 깨운 것이다. 이건 보편 복지의 길에 장애가 조성됐다는 걸 의미한다. 시민들이 세금 내기를 꺼리고 그로 인해 복지 체감을 못하면 복지국가는 환상에 불과하다. 박근혜의 몰락이 복지국가의 몰락이 되어서는 안된다. 박근혜 정권의 뒤만 좇는 야당이 손에 쥘 것은 집권 비전 없는 야당, 신뢰 잃은 야당뿐이다. 대안정당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지 않는다. (…) 그러나 새정치연합에 증세, 복지는 집권 비전이 아니라 반대의 도구인 것 같다.”

-야당의 세금폭탄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경향신문 기명 칼럼ㆍ이대근 논설위원) ☞ 전문 보기

“‘2013년 세법 개정시 정확하게 문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제대로 된 문제의식도 갖지 못했던 책임이 큽니다. 부끄럽습니다.’ 며칠 전 문자 메시지를 한 통 받았다.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의원이었다. 2013년 당시 지도부였던 이 의원은 이날 기자와 연말정산 ‘대란(大亂)’과 관련해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 연말정산 대란이 계속되면서 야당은 연일 정부·여당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 시선은 싸늘하다. 2013년 세법 개정안 제출 당시 국회가 ‘찬성 245, 반대 6’이라는 압도적 지지로 이를 통과시킨 사실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당 지도부는 여권 책임론을 제기하면서도 ‘우리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전제를 붙인다. (…) 2013년 8월 정부가 세법 개정안을 처음 제시할 당시 야당은 장외 투쟁까지 벌였다. (…) 하지만 정부가 소득세 추가 부담 기준을 연소득 3450만원에서 5500만원으로 상향 조정하면서 비판은 사그라졌다. 당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정부 대책이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우려가 많았다. 하지만 야당은 이 문제에 달려들기보다는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장외 투쟁에 전념했다. (…) 연말정산 대란의 근본 책임은 정부와 여당에 있다. 하지만 야당 또한 “정쟁(政爭)에 골몰해 민생을 외면했다”는 비판을 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당시 야당 의원들이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장외 투쟁에 나설 시간을 쪼개서 세법 개정안의 맹점(盲點)을 분석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 야당이 해야 할 가장 큰 역할은 정부 정책에 대한 견제와 감시다. 이번 기회에 야당 의원들이 거리에서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것보다 정부 정책이 국민과 나라에 미칠 영향이 무엇인지 파악해 지적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야당 의원의 연말정산 反省(조선일보 ‘기자의 視角’ㆍ최승현 정치부 기자) ☞ 전문 보기

불순물을 배제한 상태가 순수다. 오염원은 세력이 결정한다. 쫓겨나는 쪽은 비주류 약자다. 이들에겐 강제에 저항할 자유가 있다. 순치와 획일화는 통치술이다. 불온이 각성을 이끈다.

“노벨문학상 후보를 거론할 때 한국 문인으로 가장 자주 이름이 오르는 이가 바로 고은 시인이다. (…) 비록 번번이 수상에 실패해 조금 민망해졌지만 그래도 그가 해마다 수상자 후보로 언급되는 것은 바로 그의 시가 지닌 저항의 정신 때문이다. (…) 문단은 고은이 실존과 허무에 계속 머물면서 사회 현실에 눈을 감았더라면 노벨문학상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릴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고은의 시가 아니라도 문학은 저항이 생명이다.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고 그것에 맞서 싸울 때 비로소 살아있는 예술이 된다. 반대로 현실에 안주하고 그것을 즐기는 예술에서는 긴장도, 창의적 상상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1960년대 시인 김수영이 일찍이 시는 불온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같은 저항과 불온의 정신을 지금 정부가 거세하려 하고 있다. 우수문학도서의 선정 기준에 ‘특정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순수문학 작품’을 포함시킨 것은 그것이 단순한 하나의 기준이 아니라 문학의 생명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 해방 이후, 그리고 1950년대와 1960년대 순수문학을 외치던 이들이 문단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는 친일 활동을 하거나 권력에 빌붙었으니 그들 입에서 나온 순수문학은 결코 순수할 수 없었다. 그 순수문학이라는 용어는 억압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1980년대를 거치며 사실상 소멸했고 이제는 보수적인 문인조차도 좋은 문학, 그렇지 않은 문학으로 나눌 뿐 섣불리 순수문학을 말하지 않는다. (…) 그런데도 정부가 갑자기 순수문학을 들고 나온 것은, 암흑 같았던 1970년대의 기준을 되살려 통제와 감시를 하겠다는 발상을 드러낸 것이라고 문인들은 입을 모은다. (…) 정부가 문학판과 영화판을 좌파가 장악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이번 일은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 사퇴 요구와 함께 정부의 그 같은 인식을 입증한 결정적 증거다. 냉소적으로 보자면, 유권자가 박근혜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은 바로 그 순간 한국 사회는 1970년대로 회귀하는 길에 놓였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일은 그것을 실행하려는 구체적 움직임이다. 세상을 그 시대로 되돌리고자 하는 그들에게는 문화가 불온하거나 저항적이거나 혼란스러워서는 안 된다. 그런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저항과 불온이 사라진 순종적 사회다.”

-‘순수문학’ 앞세워 과거로 가는 정부(한국일보 ‘메아리’ㆍ박광희 부국장 겸 문화부장) ☞ 전문 보기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1632~1677)의 신학정치론은 1670년 1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 책은 출생 신고를 하지 못했다. 책 어디에도 지은이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지은이만 감춘 게 아니었다. 암스테르담 출판업자 얀 리우어르츠는 책을 펴낸 곳을 함부르크라고 써 넣었고, 펴낸이의 이름도 가명으로 바꾸었다. ‘표현의 자유’를 가장 먼저, 가장 단호하게 옹호한 이 책은 표현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세상에 나왔다. (…) 스피노자를 뒤따라 영국에서 존 로크가 관용에 관한 편지(1689)를 부쳤고, 볼테르가 프랑스에서 톨레랑스에 관한 논설(1763)을 썼다. 마침내 1791년 건국의 아버지들이 미국 수정헌법 1조에 ‘표현의 자유’ 원칙을 새겨 넣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이 ‘표현의 자유’ 원칙이 겨냥하는 곳이다. 스피노자가 과녁으로 삼은 것은 바로 당대 네덜란드의 지배자들이었다. 그 시대에 네덜란드는 칼뱅파 교권주의자들이 교회와 정치를 모두 장악하고서 편협한 신앙관을 사회 전체에 강요하고 있었다. 이 지배집단은 무지한 대중을 거느리고서 깨어 있는 소수의 입을 틀어막았다. (…) 스피노자ㆍ로크ㆍ볼테르가 같은 목소리로 요구한 것은 소수파의 신념과 의견을 탄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 스피노자가 ‘표현의 자유’로 말하려 한 것은 지배적 가치에 맞서 다른 견해를 표현할 자유였지, 강자의 자리에서 약자를 내려다보며 비아냥거릴 자유가 아니었다. 무함마드 모독을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그 자유는 ‘표현의 자유’ 원칙이 태어난 이유를 헤아리지 못하는 오만한 자유이며 자유의 남용이다. (…) 표현의 자유가 진정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경우를 가까이서 찾는다면, 종북몰이를 당한 신은미ㆍ황선씨의 통일콘서트일 것이다. 주류 지배층의 생각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이단으로 몰아 탄압하는 것,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분개했던 그 완고한 교권세력이 하던 짓이다. ‘표현의 자유’의 적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스피노자와 표현의 자유(1월 23일자 한겨레 ‘아침 햇발’ㆍ고명섭 논설위원) ☞ 전문 보기

* ‘칼럼으로 한국 읽기’ 전편(全篇)은 한국일보닷컴 ‘이슈/기획’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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