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끊임없이 폭력성과 싸워
악마성 제어하는 본성이 더 발현
"현재가 가장 나쁜 시대라는 생각은 인간 진화과정의 인식상 오류… 폭력 줄여온 요소 인정해야 남은 폭력도 줄여 나갈 수 있어"
“현재 우리는 종의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럴 리가. 이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이를 봤나. 불과 100년 전 터진 제1차 세계대전으로 1,500만명이 사망하고, 80년 전 제2차 세계대전 사망자는 그 세 곱절을 훌쩍 넘는 5,500만명이다. 그 뿐인가.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의 학살 등 이 모든 광기 어린 도륙이 불과 지난 한 세기 동안 벌어졌다. 순진무구해 보이는 이 돌출발언의 주인공은 뜻밖에 미국 저명 진화심리학자이자 세계적 지식인으로 손꼽히는 스티븐 핑커다. 그가 평화론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도발한 까닭은 무엇일까.
제55회 한국출판문화상 번역부문 수상작인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사이언스북스)는 폭력의 홍수에 치를 떠는 우리 시대 정서에 숨은 오류를 들추는 책이다. 인류학, 사회학, 문학 등 각종 사료 분석을 한 핑커가 2012년 미국에서 출간했고, 1,400쪽이 넘는 까다로운 대작을 지난해 번역가 김명남씨가 유려한 문장으로 옮겨 국내에 내놓았다.
19일 오후 7시30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회관 체칠리아홀에서 열린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북콘서트에서는 진화심리학자인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가 핑커의 연구를 안내하는 길잡이로 연단에 섰다. ‘폭력은 과연 줄어들었는가’를 주제로 한 특강에서 전 교수는 이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살인, 강간, 체벌 등 모든 종류의 폭력이 역사적으로, 매우 꾸준히 감소해왔다는 것”과 “우리 본성에는 폭력을 일으키는 악마도 있지만, 폭력을 제어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천사 같은 속성이 더 발현되게 역사적, 외부적 환경 변화가 주도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흔히 하는 “예전엔 살기 좋았는데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선한 본성이 타락했다”는 생각은 인류 진화의 역사를 통틀어 보면 맞지 않는다.
‘폭력 감소’를 주장하는 핑커는 6가지 역사적 경향을 소개한다. ▲평화의 과정 ▲문명화 과정 ▲인도주의 혁명 ▲긴 평화 ▲새로운 평화 ▲권리혁명 등이다. 우선 평화의 과정은 국가 및 정부의 출현으로 폭력이 통제된 정황을 말한다. 전 교수는 “선사시대에 타인에 의해 살해당한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사망자의 15% 수준”이라며 “인류 역사상 가장 폭력적이었다는 20세기 유럽, 미국에서 폭력으로 숨진 사람은 1% 정도”라고 설명했다. 제3의 중재자 혹은 감시자로서 국가가 등장하면서부터 폭력으로 인한 사망자 비율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그러나 이 같은 변화가 늘 좋았던 것은 아니다”라며 “돼지를 키우는 농부가 돼지끼리 서로 싸우는 것을 말리는 것과 같이 시민들의 싸움을 말린 권력이 경우에 따라 시민을 폭력으로 탄압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문명화 과정은 상업의 발달과 맥을 같이 한다. “잉여생산물을 상호 교환하는 상업이 시작되면서 내가 수확을 높이기 위해서는 상대가 죽는 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 살기를 바라야 하는 거죠. 순전히 이기적 동기에서 말이죠.”
인도주의 혁명은 17~18세기 이후 고문, 가학, 마녀사냥 등이 급격히 줄어든 이성 시대의 도래를 말한다. 각국 박물관에 놓여있는 고문기구들은 17세기 이전 사법에 의해 일상적으로 행해졌던 잔학한 고문의 실상을 보여준다. 불태우거나 바퀴에 매달거나 물에 끓여 죽이는 것은 물론 신체에 송곳을 쑤셔 넣는 일도 자행됐다. 전 교수는 “잔학한 폭력이 감소한 시기는 인쇄술이 발달하고 읽고 쓰는 능력이 보편화하는 시기, 또 도시화가 도래하는 시기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며 “미신적 사상이 사라지고 공감능력이 살아난 시기라고 핑커는 말한다”고 했다.
긴 평화와 새로운 평화는 20세기를 말한다. 세계 2차대전이 5,500만명의 사망자를 낳은 비극이었지만, 세계 인구 급증을 고려하면 인구 대비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분쟁은 아니었다. 인구 대비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은 8세기 당나라 ‘안록산의 난’이다.
“16~17세기에는 강대국들이 항상 치고 받고 싸웠지만, 이제 이들이 싸우지 않는 긴 평화 시기가 도래했다고 핑커는 말합니다. 특히 냉전 이후로 강대국들이 전쟁을 하지 않는 새로운 평화시대가 온 거죠.” 이 평화를 이끈 요인은 민주주의, 리바이어던의 역할을 하는 국제기구, 상대의 존재를 통해 이득을 보려는 상업적 이기심 등이었다.
권리혁명은 1950년대 이후 소수집단, 여성, 어린이, 유색인종 등을 향한 폭력에 반발하게 된 경향을 뜻한다.
이런 역사적 경향 속에서 우리 본성의 악마 즉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도구적 폭력 ▲복수심 ▲우세경쟁 등이 힘을 잃고 천사적 속성이 발현돼 폭력의 감소를 이끌었다는 것이 핑커의 생각이다. 본성의 천사는 ▲감정이입 ▲자기통제 ▲도덕감 ▲이성 등이다.
하지만 물리적 폭력은 줄어든 대신 사회적 언어적 폭력은 더 심해진 것 아닐까. 특강 뒤에 쏟아진 이런 질문에 대해 전 교수는 “좀 더 교활하게 행해지는 감시사회의 폭력, 정신적 폭력이 심화하고 있긴 하지만 핑커는 우선 성폭력, 살인 같은 명시적 폭력에 포커스를 맞췄다”고 답했다.
이런 반문도 나왔다. “주변에서 여전히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인구 대비 사망자가 줄었다는 숫자놀음이 대체 무슨 의미인가요.” 이에 대한 답변은 번역 내내 저자의 혼을 새긴 김명남씨가 했다. “핑커도 같은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다만 그는 ‘사람들이 항상 현재가 가장 나쁜 시대라고 생각하는 것’을 인간 진화과정의 인식상 오류라고 해요. 그게 안타까운 거죠. 지금까지 우리가 폭력을 줄여온 요소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앞으로 남은 폭력은 어떻게 줄여나가겠느냐는 것이죠.”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제55회 한국출판문화상 수상작 릴레이 북콘서트는 다음달 9일까지 매주 목요일 열린다. 다음 순서는 26일 서울 중구 스페이스노아에서 저술-학술부문 수상작 ‘한국 자본주의’(헤이북스) 의 저자 장하성 고려대 교수의 강연이다. 주제는 ‘3무 시대의 3포 세대는 희망이 있는가’이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 홈페이지 검색창에 ‘한국출판문화상’을 입력하면 참가신청 페이지로 연결된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박준호 인턴기자(동국대 불교학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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