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에 대한 관심이 단색화를 비롯한 추상미술에 머문 가운데 국내 현대미술의 또 다른 큰 축을 담당했던 실험미술 1세대 작가들을 재조명하는 전시가 나란히 열린다.
갤러리 아라리오서울(서울 소격동)은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김구림(80)의 개인전 ‘삶과 죽음의 흔적’을, 갤러리현대(서울 사간동)는 실험미술의 영역을 확장시켰다고 평가 받는 이건용(74)의 개인전 ‘이벤트-로지컬’을 30일부터 10월 16일까지 연다.
고령에도 조수 없이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김구림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대형 설치, 영상 및 조각 신작 등으로 이뤄진 ‘음양’시리즈 7점을 공개한다. 동시대 각종 사건을 모티프로 제작된 작품들은 모두 인간의 삶과 죽음을 다루고 있다. 기울어진 배 안에 해골을 담아놓은 작품(15-S, 2016)은 시리아 난민의 죽음에, 흙 무더기 안에 어린 아이 인형을 여기저기 파묻은 작품(16-S, 2016)은 아동 학대ㆍ살해 문제에 착안했다.
사무실로 쓰던 공간을 비운 뒤 흐릿하게 처리한 포르노 영상을 틀어놓기도 했다. 동물 소리와 뒤섞인 이 영상은 성(性)이 단순 쾌락으로 전락해버린 시대를 표현한 것이다. 김 작가는 영상 옆에 공자의 ‘논어’를 배치해 도덕의 문제를 환기했다.
김 작가는 29일 기자간담회에서 “애매모호한 표현을 사용해 현대미술을 어렵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왜 작품이 변하기만 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면서 “시대가 변하면 사고가 변하고, 사고가 변하면 당연히 작품도 변해야 한다”며 “내 안에 있는 시대성이 자연스럽게 작품에 녹아 드는 것”이라고 답했다.
이건용 작가는 1970년대 작업했던 자신의 행위미술 작품을 소개한다. 추상미술의 이면을 살펴보자는 기획 의도에 맞춰 그의 전성기 작품을 보여준다. 이 작가는 1960년대부터 ST(Space and Time) 미술학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한국의 실험미술을 발전ㆍ확장시켰다. 전시는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흐름의 최전선에 섰던 이 작가의 퍼포먼스와 관련 작품, 드로잉, 사진 자료 등으로 구성됐다.
전시 제목인 ‘이벤트-로지컬’은 그가 자신의 행위예술을 지칭한 용어다. 스스로 “합성이 불가하다”고 표현하는 두 단어를 함께 사용한 것은 혼란과 전근대성이 팽배한 사회에 자신의 논리적인 작품이 일종의 해답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는 캔버스 뒤에서 손을 앞으로 넘겨 펜이 닿는 만큼만 그리거나, 팔에 부목을 대고 그리는 방식으로 한계 상황을 연출했다. 그는 “사회 체제와 당대 권력이 모든 담론을 장악하던 시대였다”며 “신체가 허용한 범위 내에서만 그리겠다는 것은 보지 못하고 판단하지 못했던 시대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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