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의 재계약이 결국 보류됐다. 서울시향 이사회는 28일 정기이사회를 열고 정 감독과의 재계약 체결안을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고 내년 1월 중 다시 논의키로 했다. 재계약 보류는 시향 운영을 두고 정 감독과 마찰을 빚던 박현정 전 시향 대표에 대한 직원 성추행 및 인격모독 폭로가 허위이며, 폭로과정에 정 감독의 부인인 구 모씨가 직접 개입했다는 경찰 발표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막장 드라마’같은 추문이 마에스트로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지난해 12월 시향 직원 17명이 박 전 대표의 직원 성추행 및 인격모독 행태를 폭로했을 때만 해도 박 전 대표의 잘못은 명백해 보였다. 녹취록에 ‘XX’ 등으로 나타난 숱한 상소리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교향악단의 대표로서 자질과 전횡을 의심케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박 전 대표가 시향 개혁과정에서 정 감독과의 갈등 사실을 밝히고 폭로 배후에 정 감독이 있다고 주장했을 때나, 시민단체가 정 감독의 돈 씀씀이를 두고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고발했을 때도 여론은 애써 정 감독 편에 머물렀다.
정 감독에 대한 지지는 높은 예술적 성취에 대한 신뢰에 기반한 것이다. 신동 피아니스트로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정 감독은 지휘자로 전향해 1990년 프랑스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음악감독 겸 지휘자로 선임돼 세계적인 마에스트로 반열에 올랐다. 그 해 3월 개관 기념작인 베를리오즈의 ‘트로이인’ 전막 지휘에 대해 세계 음악계는 “완벽하고 열정적이며 순도 높은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음악의 승리자가 되었다”는 찬사를 바쳤다. 그런 그가 2006년부터 서울시향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일하며 시향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확고한 평가를 받았기에 다른 거장들에 비해 결코 후하다고 할 수 없는 연봉이나, 항공료ㆍ숙박비 남용 시비조차도 구차해 보였다.
하지만 경찰이 밝힌 정 감독 부인의 허위 음해 개입 혐의는 정 감독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윤리적 문제를 던지고 있다. 비록 박 전 대표의 언행과 관리 스타일에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부인이 정 감독 비서에게 “시나리오를 잘 짜서 진행하라”는 메시지를 전할 정도로 음해를 배후에서 지휘한 게 맞다면 정 감독도 도의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시향 이사회의 결정은 일단 재계약 보류지만, 진작부터 사퇴 의사를 밝혀온 정 감독이 이달 31일로 끝나는 임기를 넘어 구차하게 재계약을 기다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정 감독이 알았든 몰랐든, 그의 서울시향 10년 공적이 추문으로 얼룩지는 상황을 보는 심경은 안타깝기 짝이 없다. 마에스트로의 남은 공연이라도 순조롭게 마무리 되기를 바랄 뿐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