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경제 활성화 정책의 핵심 4개월간 대출규모 3조원 넘어
78%가 기존 거래기업 대상...中企 기술력만으론 퇴짜 일쑤
자칫 실패 땐 거대 부실 우려도
정부 눈치보랴, 리스크 피하랴...은행들 '면피용 실적' 만 양상
기술금융 초기 실적 급증 불구 企銀 38%등 은행간 편차 크고 실적없는 신생기업엔 그림의 떡
은행들 기술평가서에 불신 기류..."실적 점검 등 압력 가하기보다 은행부담 덜 안전장치 마련해야"
창업 3년째를 맞은 벤처업체 A사는 최근 은행에 기술금융 대출을 문의했다 거절 당했다. 자동차 관련 기술특허를 이용, 기술신용평가기관(TCB)로부터 높은 등급을 받았지만 올해 악화된 경영실적이 걸림돌이었다. A사 대표는 “기술력만으로 대출을 해준다기에 한 달 넘게 기술평가에 매달렸는데, 막상 은행 창구에서는 추가 담보를 요구했다”고 토로했다.
중견기업 B사는 최근 은행에 담보대출을 받으러 갔다가 기술금융 대출로 전환했다. 해당 은행과 3년 넘게 거래해왔고, 자산과 경영실적이 안정적이어서 담보대출을 받는 데 무리가 없었지만 은행 측이 “이왕이면 특허기술을 활용해 기술금융 대출을 받으라”고 권했다. B사 사장은 “은행이 권하는데다, 큰 차이가 없어 기술대출을 받긴 했지만 기술력이 있다고 대출을 더 해주거나 금리 혜택이 있는 건 아닌 것 같다”고 전했다.
박근혜 정부 창조경제 활성화 정책의 핵심인 기술금융 확대 방안이 본격 시행된 지 4개월을 맞았다. 당국의 독려와 압박 속에 기술금융 실적이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지만, 그 실효성과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함께 커지고 있다. 신생 중소기업의 기술력을 토대로 은행들에게 보다 적극적인 신용대출을 독려한다는 취지는 좋지만, 자칫 실패할 경우 국가 경제 전체에 거대한 부실의 씨앗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매 정권마다 반복되는 캠페인 성 금융정책의 한계에서 벗어나 기술금융이 ‘롱 런(long run)’할 수 있는 토대부터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2일 금융당국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 7월1일 정부가 TCB 연계 대출 시스템을 본격 가동한 이후 은행들의 기술신용대출 금액은 가파르게 늘고 있다. 7월말 1,922억원에 그쳤던 대출규모는 8월말 7,221억원, 9월말 1조8,334억원으로 급증했고 10월말 기준으론 3조원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아직은 은행간 편차가 큰 상태다. 국책은행이자 중소기업을 주로 상대하는 기업은행의 대출규모(9월말 현재 6,920억원)가 전체의 38%에 달해, 국민ㆍ우리ㆍ신한ㆍ하나 등 4대은행 합계(48%)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정부 보증이나 정책자금 지원 같은 보호장치 없이 은행 스스로 리스크를 감수하는 은행자율 대출(6,995억원) 역시 아직은 전체의 3분의1 수준(38.1%)에 머물고 있다. 정부의 본격 드라이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은행들이 몸을 사리고 있다는 방증이다.
정부가 ‘기술금융 종합상황판’을 통해 매달 은행들의 실적을 공개하겠다고 압박에 나서면서 일선에선 눈가림용 실적도 양산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기존 거래 기업에게 기술금융 대출을 더 안겨주는 방식이다. 최근 금융감독원의 국정감사 제출 자료에 따르면, 7~8월 중 TCB 평가서를 토대로 나간 은행권 기술금융 대출(7,221억원) 가운데 무려 78.4%(5,662억원)가 1년 이상 해당 은행과 거래하던 기업들 대상이었다. 기술금융으로 포장이 되기는 했지만, 새 기술보다는 기존 담보나 신용등급 등을 더 고려했다는 얘기다.
기술금융의 보증수표인 기술평가인증서를 받고도 대출에서 소외되는 경우 역시 적지 않다. 예전부터 기술평가인증서 제도를 운영해 온 기술보증기금(기보)에서 기업이 인증서를 발급받아 실제 대출까지 성사된 비중은 2011년 95%에서 올 7월 현재 76%(2,052건 중 1,560건)까지 떨어졌다. 한 벤처기업 대표는 “은행에서 아무리 기술금융 대출을 해준다고 해도 경영실적 등이 없는 신생기업들은 아예 은행에 갈 엄두가 안 난다”고 말했다.
은행들의 볼멘소리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대출의 근거인 기술력을 검증할 인력과 노하우를 당장 급조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정부의 실적 압박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 방침에 어떻게든 성의를 보이려다 보니 기존 거래기업이나 가급적 오래되고 덩치 큰, 이른바 검증된 기업부터 기존 일반 대출을 기술금융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는 하소연도 들린다. 한 시중은행 여신담당 임원은 “은행 자체의 기술 검증 능력도 없고, 기술평가를 해주는 TCB조차 전문인력이 부족해 TCB 평가서의 신뢰도도 낮다”며 “최근의 기술 대출이 훗날 어떤 결과로 돌아올 지 두렵기까지 하다”고 우려했다. 은행들은 현재 TCB로 선정돼 있는 기보, 나이스신용평가, 한국기업데이터의 기술평가등급이 같은 기업에게도 제각각인 점 역시 불안 요소로 지적하고 있다.
TCB 업계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기술신용평가를 하려면 관련 분야 자격증을 소지한 전문가를 고용해야 하는데 인건비가 상당히 높을 수밖에 없다. 업체당 100만원 안팎의 낮은 수수료도 평가의 신뢰도를 저해하는 요소다. 금융당국도 수수료 문제를 두고 딜레마에 빠져 있다. 수수료를 높이자니 은행 부담이 높아지고, 수수료를 인하하자니 기술평가가 부실해질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난달 금융권을 뒤흔든 모뉴엘 사태는 기술금융에 또 다른 불안감을 안기고 있다. 조작된 장부를 토대로 대출을 받아 낸 사기가 모뉴엘 사태의 본질이지만, 그 과정에서 은행들을 속인 결정적인 수단은 무역보험공사의 보증서였다. TCB 평가서가 절대적 역할을 하는 현행 기술금융 시스템 역시 언제든 악용될 여지가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대해 금융위 관계자는 “인증ㆍ평가 제도가 악용될 여지는 모든 정책에 불가피하다”며 “은행들이 평가서라는 참고자료를 활용해 자체 판단을 내릴 능력을 서둘러 키워야 한다”고 해명했다. 그는 “아직 기술금융 혜택이 기존 거래기업 등에 편중되는 현상도 나쁘게만 볼 게 아니라 대출금리 인하 등 긍정적 측면도 있다”며 “최근 보증ㆍ정책자금에 기대지 않는 은행 자율의 기술금융 규모가 빠르게 늘고 있는 점도 고무적”이라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기술금융 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는 제대로 된 인프라 구축이 우선이라고 강조한다. 정도성 이화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책적으로 기술금융을 활성화하려면 은행이 모든 부담을 떠안는 구조에서 탈피해 안전장치를 마련해줘야 한다”며 “매달 실적점검 등으로 정부가 압력을 가하면 실적 부풀리기 등 부작용만 나타날 뿐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큰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익명을 원한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무엇보다 기술금융이 이번 정권에서만 반짝하고 말 정치구호성 정책이 아니라는 확신부터 심어줘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강지원기자 stylo@hk.co.kr
김진주기자 pearlkim7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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