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운동 상당한 성과 거뒀지만
공평한 분배로 직결 안 돼
제도권과 무조건 거리두기 지양해야
“국가가 끊임없이 복지를 축소하면 결국 가장 취약한 집단이 희생됩니다. 여성운동은 일상의 차별과 혐오에 목소리를 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런 거시적 불평등에 대한 질문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페미니즘 정치경제학 연구자 시린 라이 영국 워릭대 정치학과 교수가 8일 저녁 서울 마포구 합정동 후마니타스 책다방에서 독자들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인도 출신의 정치학자인 그는 마오쩌둥 전후의 중국 사회를 연구하며 현지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성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것을 목도한 이후 페미니즘 정치경제학을 연구해 왔다. 주로 제3세계 페미니스트의 시각으로 탈식민국가의 발전, 사회운동과 국가의 관계 등을 연구했고, 민족주의 시대부터 현재까지 페미니즘 진영의 성과 및 논쟁을 다룬 ‘젠더와 발전의 정치경제’(후마니타스)가 지난해 제자인 정치학박사 이진옥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의 번역으로 국내 출간됐다.
라이 교수가 강조하는 것은 지금까지 여성의 정체성 투쟁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공평한 분배로 직결되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영국에서도 2006년 평등법의 제정으로 인종, 젠더, 성적지향, 장애 등의 다양성이 인정되는 성과를 거뒀지만, 긴축재정으로 인한 재정삭감의 대가를 가장 먼저 감내해야 하는 것은 여성 분야였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이 기침을 하면 한국이 독감에 걸린다고 할 정도로 재편된 금융 질서가 재편되고 우리의 삶을 취약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여성차별 나아가 여성혐오 현상이 세계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여성혐오 현상이 경쟁이 치열해지고 복지가 보장되지 않은 사회적 조건에서 발견된다는 해석이다.
노동시장이 확대되고 세계화하며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적극 진출하고 있지만, 구조조정의 여파를 감당하며 가정 안팎에서 노동시간이 연장되고 여성 사이의 격차도 커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대해 라이 교수는 “현재와 같이 복지국가의 위상이 약화되는 시점에서는, 여성운동이 무조건 국가와 제도권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은 문제가 될 수밖에 없고 제도적인 재질서 구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즉 인정의 정치에서 재분배의 정치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라이 교수는 “영국에서도 여전히 여성 의원들이 여전히 어떤 구두를 신고 왔는지, 가슴 골이 보이는 의상인지 아닌지 따위의 이야기를 남성들로부터 들어야 하는 만큼 일상의 여성차별과 혐오에 대해서 저항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거시적 차원의 고민도 동반돼야 한다”며 “여성운동이 정치경제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한 “여성들이 그간 계급, 종교, 성별 등에 따른 정체성 속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을 강조해 왔지만 더 나아가 ‘듣고 실천하기’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라며 각국 여성운동의 연대를 언급했다. 라이 교수는 “아프리카 여성들에 대한 할례가 나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는데도 그들의 삶이 실제로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며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글ㆍ사진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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