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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와 붓을 벗어난 수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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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와 붓을 벗어난 수묵

입력
2015.11.04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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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미술관에 전시된 김호득의 '산 아득'은 손가락에 먹을 묻혀 그린 그림이다. 산수화로 볼 수 있지만 손의 움직임을 자연스레 반영한 그림에서 서구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이 엿보인다. 서울대 미술관 제공
서울대 미술관에 전시된 김호득의 '산 아득'은 손가락에 먹을 묻혀 그린 그림이다. 산수화로 볼 수 있지만 손의 움직임을 자연스레 반영한 그림에서 서구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이 엿보인다. 서울대 미술관 제공

“요즘 현대 수묵이 화두예요. 그런데 수묵화 작가들이 모인 전시장을 보면 저마다 다른 곳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어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전 수묵 그대로는 어렵다는 겁니다.”

광목천에 먹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 김호득은 수묵화를 계승한 이들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한국, 중국, 대만의 현대 수묵화가들이 그리는 작품은 수묵화 하면 흔히 떠올리는 전통적인 산수화가 아니다. 전통적인 매체나 양식 자체는 놓지 않았지만 현대미술의 화두인 ‘새로운 미를 탐색하라’는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서울 대학동 서울대학교미술관(02-880-9504)에서 11월 22일까지 열리는 ‘거시와 미시’전은 한국 수묵화가 5명과 대만 수묵화가 4명이 참여한 전시다. 대만 작가 리이훙은 광목천을 스물다섯 칸으로 나눈 면 위에 물가에서 볼 법한 돌덩이를 잔뜩 그렸는데, 각 칸의 그림은 이어진 듯 끊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풍경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반복해서 그린 추상화를 이어 붙인 듯한 느낌이다. 반면 한국의 신영상처럼 드러내 놓고 추상화된 그림을 그린 경우도 있다. 마지(麻紙ㆍ삼베로 만든 종이) 위에 먹으로 커다란 선을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그어나간 그의 작품은 전형적인 추상화지만 마지로 번져나간 먹의 흔적은 서구 추상화에서 볼 수 없는 이채를 띤다.

중국 작가 웨이칭지의 '파라마운트산 점령 2'는 할리우드 영화의 대표적인 상표에 중국의 상징인 붉은 깃발과 별을 결합함으로써, 몰려오는 서구 문화를 수용하는 입장이 된 중국의 자존심을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다. 학고재 제공
중국 작가 웨이칭지의 '파라마운트산 점령 2'는 할리우드 영화의 대표적인 상표에 중국의 상징인 붉은 깃발과 별을 결합함으로써, 몰려오는 서구 문화를 수용하는 입장이 된 중국의 자존심을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다. 학고재 제공

서울 사간동 학고재(02-720-1524)에서 11월 29일까지 열리는 ‘당대수묵’전에는 한국 작가 3명과 중국 작가 2명이 참여했다. 전시 제목은 당대수묵이나, 모두 수묵을 쓴 것은 아니다. 한국의 조환은 중국 당(唐)때 서예가 장욱(張旭)이 쓴 반야심경 구절을 그대로 철판 위에 새기고, 피안으로 떠나는 배를 그 앞에 세우는 설치미술 작품을 선보였다. 중국의 웨이칭지가 그려낸 작품들은 유화라 해도 속을 만큼 채색이 화려하고, 그림 소재도 유명 상표 ‘푸마’ ‘파라마운트 픽처스’ 가 등장하는 등 대중적이다.

권영우의 '무제'는 한국의 전통 한지를 칼로 찢어낸 후 틈새로 프랑스의 푸른 잉크인 과슈를 흘려 번지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국제갤러리 제공
권영우의 '무제'는 한국의 전통 한지를 칼로 찢어낸 후 틈새로 프랑스의 푸른 잉크인 과슈를 흘려 번지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국제갤러리 제공

수묵의 현대화는 1960년대부터 한국 화단의 중요한 과제였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02-3701-9500)에서 내년 3월 6일까지 기증작품전을 열고 있는 서세옥이나 국제갤러리(02-735-8449)에서 12월 6일까지 작품전이 열리는 고(故) 권영우는 모두 동양화과 출신이지만, 서양회화의 영향을 받아 각각 수묵추상화와 실험적 수묵화로 나아갔다. 서세옥의 ‘인간들’은 수묵의 점과 선, 여백을 활용해 극도로 추상화된 인간 형상을 그려낸 작품이다. 권영우는 서구 앵포르멜 회화의 영향을 받은 1970년대 단색화가의 일원으로 분류되지만, 작품의 기원은 명백히 먹과 한지에 있다. 그는 한지를 찢고 그 사이로 번져나가는 먹과 과슈(Gouacheㆍ프랑스산 푸른 잉크) 얼룩이 만들어내는 우연적인 모양을 회화에 사용했다.

1960년 서세옥이 서울대 동양화과 출신들과 결성한 ‘묵림회’를 현대 수묵의 시작으로 본다면,‘새 수묵화’ 담론에 대한 요구는 50년 이상 이어져 온 셈이다. 그럼에도 수묵화가들로부터 하나의 경향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수묵화 하면 떠오르는 오랜 이미지는 이들에게 역사적 기반이 아니라 무거운 굴레처럼 보인다. 어쩌면 전시 참여작가들 중 젊은 축에 드는 웨이칭지의 말이 다음 세대 수묵화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다. “딱히 동양화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해서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면서 내게 익숙한 매체를 사용한 것뿐이다.”

인현우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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