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鄭周永) 후보는 나와 김동길(金東吉) 의원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정 의원은 문화부장관 한번 해야지. 김 의원은 청와대에서 결혼식 올릴 수 있게 해줄게.”
청와대를 바라보며 “저 집 주인은 나야”라고 말하던 정 후보였다. 나는 대통령선거 유세를 좇아 다니며 그가 대통령이 될 것을 단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정 후보는 왜 대선에 나섰을까. 나는 그가 기업을 하면서 정치인들에게 많은 시련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툭하면 실시하는 세무조사에 큰 염증을 느낀 것 같다.
그가 평소 “평생 세금 한번 안 낸 사람들이 대통령을 하면 되겠어? 직업도 없었고, 장사도 안 해본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소가 웃는다, 소가 웃어”라고 말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정 후보는 참패했다. 12월18일 14대 대통령선거에서 3위에 그쳤다. 득표수는 전체 유권자의 16.3%에 불과한 388만67표.
김영삼(金泳三) 민자당 대표가 997만7,332표(42.0%)로 대통령에 당선됐고 김대중(金大中) 민주당 대표는 804만1,284표(33.8%)를 얻었다.
적어도 30%는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던 우리로서는 충격 그 자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선참패 원인은 정 후보가 너무 현대 식구를 믿었기 때문이다. 전국에 깔린 현대 식구들만 믿고 지구당 위원장들은 거의 거들떠 보지 않은 것이다.
오죽하면 선거를 한달 여 앞두고 김광일(金光一) 의원이 탈당을 하면서 “실질적인 선거운동은 전국 각 지역을 분담해 거미줄 같은 세포조직이 된 기업체 직원들이 맡고 있다”라고 말했을까.
당의 주요 직책도 ‘현대 맨들’이 독식했다.
김종식(金鍾植) 당시 현대중공업 전무가 호남특보, 채경석(蔡京錫) 울산투자금용 상무가 정책조정실장, 백기범(白基範) 금강기획 부사장이 대선기획단 실장으로 버티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정 후보는 은연중 정치인들을 ‘게으르고 돈이나 탐 내는 존재’로 여겼던 것 같다.
당시 언론에서는 정 후보가 선거운동 자금으로 5,000억원을 썼다고 보도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선거운동이 오로지 현대 식구들에 의해 진행되다 보니 지구당에는 돈이 거의 내려오지 않았다. 대선이 코 앞에 닥쳤는데도 지구당 위원장들은 손끝 하나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구리 지구당도 마찬가지였다.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누가 자기 돈 쓰면서 선거운동을 하겠는가.
그런데도 정 후보는 당내에서 누가 현대 식구들을 안 좋게 말하면 곧바로 화를 냈다. 강원도 한 유세에서 꽤 많은 청중이 모인 적이 있었다.
강원도가 고향인 정 후보가 흡족해 한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내가 “강원도 이런 시골에는 원래 사람들이 없다. 여기 있는 청중은 모두 현대맨들이다” 라고 충언을 하자 마구 화를 냈다. 며칠동안 유세장에 데리고 가지 않을 정도였다.
이 같은 배경에서 터진 정 후보에 대한 흑색선전은 그야말로 결정타였다.
“아파트 값을 반으로 내리겠다”는 공약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던 그가 “대통령을 하기에는 너무 늙었다”는 소문 하나로 주저앉고 만 것이다.
아무리 경제가 중요하지만 “바지에 오줌을 쌌다”는 이야기가 들리는 사람에게 어떻게 나라를 맡길 수 있나. 이것이 당시 유권자들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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