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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줄의 레일 타고… 진열장이 ‘들락날락’

입력
2016.05.1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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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염천교 수제화 거리의 이른 아침 풍경. 대부분 점포의 셔터가 닫혀 있다.
서울 중구 염천교 수제화 거리의 이른 아침 풍경. 대부분 점포의 셔터가 닫혀 있다.
점포가 하나 둘씩 문을 열면서 점포 내부에 있던 유리 진열장이 밖으로 돌출되어 나와 있다. 염천교 수제화 거리의 쇼윈도엔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점포가 하나 둘씩 문을 열면서 점포 내부에 있던 유리 진열장이 밖으로 돌출되어 나와 있다. 염천교 수제화 거리의 쇼윈도엔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쇼윈도 대부분은 이동식이다. 밑바닥에 부착된 쇠바퀴가 레일을 타고 점포 안팎을 왕복할 수 있다.
쇼윈도 대부분은 이동식이다. 밑바닥에 부착된 쇠바퀴가 레일을 타고 점포 안팎을 왕복할 수 있다.
영업이 끝나고 나면 이동식 쇼윈도는 다시 점포 내부로 자취를 감춘다. 굳게 내려진 셔터 밑으로 두 줄의 레일이 뻗어나와 있다.
영업이 끝나고 나면 이동식 쇼윈도는 다시 점포 내부로 자취를 감춘다. 굳게 내려진 셔터 밑으로 두 줄의 레일이 뻗어나와 있다.

#1. 염천교 수제화 거리의 ‘숨은 비밀’

10일 오전 서울 중구 염천교에서 수제화 전문점을 운영하는 이형연 사장이 점포 문을 열고 있다. 셔터를 올리자마자 이 사장은 가로 세로 각 1.2m, 높이 2m의 진열장을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꿈쩍도 안 할 것 같던 커다란 유리상자가 거짓말처럼 움직였다. “글쎄요, 적어도 한 30년 이상 됐을걸요. 누군가 처음 해놓은 걸 보고 너도나도 설치한 지가….” 이 사장은 단 한 번의 고장 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이동식 유리 진열장의 역사를 이렇게만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옆 점포의 여사장님도, 그 옆 집도 각자의 대표 수제화가 진열된 유리상자를 점포 밖으로 밀어 내보내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어느새 유리 진열장이 줄지어 늘어서고 염천교 수제화 거리의 익숙한 풍경도 비로소 완성된다.

레일 타고 움직이는 ‘바퀴 달린 쇼윈도’

쓱 밀면 점포 안에 반 평 공간 생겨

진열장이 빠져나가고 나면 점포 안엔 반 평 남짓한 공간이 새로 생긴다. 이 사장의 5.5평짜리 점포 임대료는 월 140만원, 이동식 진열장 덕분에 실제 사용하는 면적은 6평 이상이다. 0.5평에 해당하는 임대료 12만5,000원을 매달 아끼고 있는 셈이다. 이동식 진열장의 비밀은 바닥에 있다. 밑바닥에 부착된 4개의 쇠바퀴가 두 줄의 레일 위를 구르는 원리이므로 미는 힘만으로도 이동이 가능하다. 상인 중 누구도 원조를 기억하진 못했지만 진열장 밑에 바퀴를 달고 레일을 까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 덕분에 비좁고 제한된 공간을 30년 넘게 악착같이 활용할 수 있었다. 영업을 마치면 이동식 진열장을 다시 안으로 쑥 밀어 넣고 셔터를 내릴 수 있으니 보안에도 효과적이다.

엄지제화 이형연 사장이 영업을 시작하기 위해 이동식 쇼윈도를 점포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 바닥에 두 줄 레일이 보인다.
엄지제화 이형연 사장이 영업을 시작하기 위해 이동식 쇼윈도를 점포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 바닥에 두 줄 레일이 보인다.
이 사장이 쇼윈도가 빠져나간 후 생긴 0.5평의 공간을 사용하기 전 걸레로 닦고 있다.
이 사장이 쇼윈도가 빠져나간 후 생긴 0.5평의 공간을 사용하기 전 걸레로 닦고 있다.
점포 내부에 설치된 레일. 점포 안과 밖 각각 1.2미터 정도의 길이로 설치되어 있다.
점포 내부에 설치된 레일. 점포 안과 밖 각각 1.2미터 정도의 길이로 설치되어 있다.

녹슨 레일은 염천교 밑 철길과 닮아

30년간 불황ㆍ무관심 묵묵히 견뎌

염천교의 이동식 진열장은 불황과 무관심을 묵묵히 버텨온 수제화 거리의 상징과도 같다. 닫힌 셔터 밑으로 뻗어나온 두 줄의 녹슨 레일은 세월을 싣고 염천교 밑을 지나는 철길과도 닮았다. 30여년의 세월 동안 염천교의 레일 진열장은 9,000번이나 점포 안팎을 왕복했고 하루 2m씩 총 18㎞를 달려왔다. 안타깝게도 그 사이 염천교 수제화 거리는 쇠퇴했다. 설상가상으로 서울역 고가가 폐쇄되고 교통체증이 심해지면서 고객들의 발걸음도 뚝 끊겼다. 상인들은 하나같이 “서울역 고가 때문에 손님이 10분의 1로 줄었다”며 한숨을 내쉰다. 매일 반복되는 답답한 현실 속에서 상인들은 커다란 유리상자를 세상 밖으로 내 보내며 희망을 꿈꾸고 있다.

#2. 삶의 지혜 묻어나는 나만의 아이디어

수제화 거리의 녹슨 레일이 그렇듯 결코 세련되거나 고급스럽진 않지만 서민들이 고안해 낸 수제 도구엔 세월을 거치며 터득한 삶의 지혜가 자연스럽게 묻어 있다. 경기 고양시에서 활동하는 야쿠르트 아줌마 김혜숙(57ㆍ여)씨는 아이스박스 위에 20여종의 빈 제품 용기를 가지런히 매달아뒀다. 덕분에 마치 메뉴판처럼 아이스박스에 들어 있는 모든 제품을 한눈에 파악할 수가 있다. 김씨는 “아이스박스가 투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뚜껑을 열어 놓고 있을 수도 없으니 어떤 제품들을 판매하는지 알릴 길이 없어 답답했다”면서 “빈 병 메뉴판은 이런 저런 궁리 끝에 떠오른 저만의 아이디어”라고 말했다. 제품의 실물을 보고 고를 수 있으니 판매량도 자연스럽게 늘었다. 김씨는 “아무래도 눈에 보이니까 고객들이 더 찾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야쿠르트 아줌마 김혜숙씨의 빈 병 메뉴판.
야쿠르트 아줌마 김혜숙씨의 빈 병 메뉴판.
김씨는 "아이스박스에 담긴 제품을 고객들이 직접 보고 고를 수 있게 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아이스박스에 담긴 제품을 고객들이 직접 보고 고를 수 있게 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서울 중림동의 닭칼국수 원조집에서 사용하는 가스레인지. 고무 재질의 다리마다 소주병 뚜껑이 씌워져 있다.
서울 중림동의 닭칼국수 원조집에서 사용하는 가스레인지. 고무 재질의 다리마다 소주병 뚜껑이 씌워져 있다.
가스레인지 다리에 씌워진 소주병 뚜껑.
가스레인지 다리에 씌워진 소주병 뚜껑.
선풍기와 에어컨을 쓰기 시작하면서 가스레인지 주변에 씌우는 바람막이.
선풍기와 에어컨을 쓰기 시작하면서 가스레인지 주변에 씌우는 바람막이.

야쿠르트 아줌마 빈 제품 용기로 ‘메뉴판’활용

“제품의 실물 보이니 판매량도 늘어”

서울 중구 중림동의 한 식당에서 발견한 반짝 아이디어에선 아끼고 또 아껴 쓰는 투철한 절약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주인공은 다름아닌 다 쓴 소주병 뚜껑, 닭칼국수를 끓이기 위해 상 위에 놓아 둔 가스레인지의 고무 다리 4개에 각각 씌워져 있다. 식당을 운영한 지 30년이 되도록 가스레인지를 딱 한 번 교체했을 정도로 오래 쓰다 보니 고무 재질이 갈라지고 부서지면서 까만 부스러기가 상 위에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차연숙(62ㆍ여) 사장은 “벌써 15년쯤 전인데, 소주병 뚜껑을 고무 다리에 씌워보니까 딱 들어 맞더라”면서 “성능에 문제가 없는데 오래 됐다고 버리면 안 된다. 우리 집은 뭐든지 다 고쳐 쓴다”라고 말했다. 이 식당에 있는 목재 의자 역시 흔들거린다고 버리는 대신 다리와 다리 사이에 철심을 넣어 더 튼튼하게 만들었고 의자 쿠션은 세 번이나 갈았다.

닳고 닳은 가스레인지 다리

소주병 뚜껑 씌워 사용

이 밖에도 투박하지만 기발한 아이디어는 도심 거리와 골목마다 흔하다. 비좁은 구두 수선 부스의 창문 밖에 걸어 둔 선풍기나 밀면서 이동하기 쉽도록 거대한 바퀴를 단 구두 거치대, 과일 노점의 간이 의자와 널빤지로 만든 진열대 등 직접 고안하고 만들어 낸 도구마다 스스로 악조건을 개선하려는 의지와 에너지도 넘친다. 그래서일까, 보면 볼수록 절로 미소를 짓게 하는 것, 바로 서민들의 생계 도구들이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류효진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서울 세종대로 변의 한 구두 수선 부스. 비좁은 내부 공간 대신 창문 밖에 선풍기를 매달아 놓았다.
서울 세종대로 변의 한 구두 수선 부스. 비좁은 내부 공간 대신 창문 밖에 선풍기를 매달아 놓았다.
서울 중구 봉래동의 한 구두 수선 부스 앞에 커다란 구두 거치대가 세워져 있다. 구두를 거치대 가득 실었을 때 무게가 상당한 까닭에 잘 굴러갈 수 있도록 고안했다.
서울 중구 봉래동의 한 구두 수선 부스 앞에 커다란 구두 거치대가 세워져 있다. 구두를 거치대 가득 실었을 때 무게가 상당한 까닭에 잘 굴러갈 수 있도록 고안했다.
경기 고양시의 한 과일 노점. 플라스틱 간이 의자와 널빤지로 제법 그럴듯한 진열대를 만들었다.
경기 고양시의 한 과일 노점. 플라스틱 간이 의자와 널빤지로 제법 그럴듯한 진열대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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