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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은 왕이었다... 촬영할 때마다 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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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은 왕이었다... 촬영할 때마다 성폭력"

입력
2018.03.08 04: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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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의혹을 받고 있는 김기덕 감독. NEW 제공
성폭행 의혹을 받고 있는 김기덕 감독. NEW 제공

“그는 왕이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참여했던 한 스태프는 촬영장 분위기를 이 한마디로 설명했다. 절대왕권이 지배하고 통제하는 그곳에선 그 누구도 김 감독에게 반기를 들 수 없었고, 그럴 수 있다고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다. 이 스태프는 “당시엔 김 감독의 눈밖에 나면 그 사람의 영화 커리어도 끝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며 “배우나 스태프 중 누군가 고통 받고 있어도 먼저 나서 도와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 6일 MBC 시사 교양 프로그램 ‘PD수첩’ 방송을 통해 공개된 김 감독의 성범죄 행각도 이런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자행됐다. 배우 A씨는 김 감독의 잠자리 요구를 거절했다가 결국 영화에서 하차했다고 밝혔다. 배우 B씨는 업무상 만난 자리에서 김 감독이 노골적으로 성적인 발언을 해 두려움에 떨다가 도망쳐 나왔다고 털어놨다. 더 충격적인 사례도 있었다. 배우 C씨는 영화 촬영 중 숙소에서 김 감독은 물론 당시 주연배우 조재현씨에게도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당시 상황을 “지옥”이라고 표현한 C씨는 이후 영화계를 완전히 떠났다.

방송 이후 영화계는 충격과 혼란에 휩싸였다. 관계자들은 “분노를 넘어 참담한 심정”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간 영화계에는 김 감독을 둘러싼 불미스러운 소문이 무성했고 실제로 김 감독이 언어적 성희롱을 하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끔찍한 성범죄가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앞의 스태프는 “김 감독이 여자배우와 촬영할 때면 항상 성폭력 문제가 벌어졌다”고도 말했다. 특히 위계상 약자이고 영화 참여 기회가 절실한 조단역 여자배우와 여자스태프들은 상시적인 성폭력에 시달렸다고 한다. 한 유명배우는 김 감독의 성적인 요구를 거절했다가 촬영 내내 불화를 빚었고 이후로 김 감독과 다시는 작업하지 않았다. 이 스태프는 “김 감독 영화에 기성배우보다 신인배우가 많은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김 감독의 성범죄는 공론화되지 못한 채 오랜 시간 묵인돼 왔다.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고발할 수 있는 통로도, 구제 받을 방법도 없었기 때문이다. 은밀한 곳에서 벌어지는 성범죄의 특성상 증거가 부족해 가해자를 법적으로 처벌하기는 더더욱 힘들었다. 피해자가 문제제기를 하려면 업계를 떠날 각오까지 해야 했다. 김 감독을 둘러싼 악평과는 무관하게, 김 감독과의 작업을 포기하거나 거부한 무명배우ㆍ스태프들은 “의지 부족으로 낙인 찍혀” 다른 영화에서도 기회를 얻기 어려웠다.

김 감독이 해외 유명 영화제에서 잇따라 수상해 ‘거장’으로 불리면서 그의 악행은 더 쉽게 은폐됐다. 김 감독은 2012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등 해외에서 더 인정 받아왔다.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영화노조) 홍태화 사무국장은 “영화업계가 다 그렇다는 식의 그릇된 인식도 문제이지만, 김 감독의 권위를 훼손하면 한국영화도 흠집 난다는 생각 때문에 문제를 묵인하거나 덮어주는 분위기가 없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 감독의 영화는 비주류에 속했으나 그의 ‘권위’는 주류 이상이었다. 그렇게 김 감독은 점점 괴물이 돼 갔다.

김 감독의 폐쇄적인 작업 스타일도 한 가지 이유로 거론된다. 김 감독은 저예산으로 소수 스태프와 가내수공업 하듯 영화를 제작한다. 배급사는 영화가 완성된 뒤에 결정되는 경우가 많아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통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 제작과 관련한 전반적인 문제는 제작사가 관리 감독하는데, 김 감독은 본인이 제작자이기도 해 감독권을 견제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외부의 개입이 원천적으로 차단돼 있는 폐쇄성이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영화 관계자들은 의견을 모은다. 한 중견 제작자는 “김 감독은 영화제작가협회나 영화감독조합 등에도 소속돼 있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제제할 방법이 전무하다”고 말했다.

한 영화 관계자는 “김 감독 사건으로 영화계 전체가 성폭력 집단으로 매도 당할까 우려된다”면서도 “다른 영화들도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고통스럽더라도 영화계를 정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 감독 사건을 충격적인 스캔들이 아니라 범죄로 판단해 사법 처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김기덕사건공동대책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서혜진 변호사는 “이 정도로 구체적인 증언이 나온 상황이면 피해자들의 고소 고발이 없더라도 수사 기관이 사건을 인지해 내사에 착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 변호사는 “피해자들은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다시는 생기지 않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폭로에 나선 것”이라며 “공익적 목적이 분명한 만큼 그에 합당한 제도 개선과 인식 전환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일보는 김 감독 측에 수 차례 전화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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