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벗고 싶다!"
푹푹 찌는 찜통 더위, 여성이라면 한 번쯤 가슴을 죄는 브래지어로부터 탈출을 꿈꿀 법 하다. 몇 걸음만 옮겨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더위에 노브라(No-bra) 차림으로 다닐 수 있다면 상상만 해도 얼음을 깨물듯 시원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어찌보면 개인의 선택 문제일 수 있는 노브라가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이를 음란함과 동일시 해서 사회규범을 벗어난 일탈로 보는 따가운 시선과 패션은 개인의 선택이라는 의견이 팽팽히 맞선다.
일탈 운운할 만큼 노브라 차림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불편을 유발하는 것일까. 일각에서는 노브라가 여성의 지나친 노출과 마찬가지로 성 추행이나 성 폭력을 부를 수 있다고 우려했다. 과연 그런 지 노브라에 대한 숨은 진실을 알아보기 위해 대학생 이나영(24·가명)씨가 과감하게 브래지어를 벗고 거리에 나섰다.
‘노브라 차림’으로 명동 쏘다니기 도전
사상 처음 전국에 폭염특보가 발효된 지난 11일, 이씨는 10여년 넘게 피부처럼 여겼던 브래지어와 잠시 결별하고 노브라 차림으로 회색 반팔 티셔츠만 입은 채 서울 명동 한 복판에 섰다. 평소 브래지어를 착용하면 가슴 압박과 함께 어깨 통증을 느낀 그가 노브라 도전에 나선 이유는 최근 걸그룹 f(x)멤버였던 설리의 사진 때문이었다.
설리는 노브라로 추정되는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일부 네티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이씨는 노브라가 왜 비난의 대상인 지, 어째서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행위인 지 궁금했다.
"생각보다 야하지 않아요."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 본 이씨는 거리에 나서자 약간의 부끄러움과 시원함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지하철 4호선을 이용해 서울역에서 명동역으로 이동하는 4분 동안 사람들이 아무 반응이 없자 오히려 이씨가 놀랐다. "예상과 달리 사람들이 쳐다보지 않네요."
명동 거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각자 갈 길만 바삐 갈 뿐 아무도 이씨의 옷차림을 유심히 보지 않았다. 이씨는 일부러 유명 화장품 체인점에 들려 상담원과 마주 서서 제품 상담을 받았다. 상담원 역시 가슴이 아닌 이씨의 얼굴을 보며 해당 제품을 설명했다.
노브라로 다니면 음탕한 시선의 표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창피해서 어깨를 살짝 웅크렸던 이씨도 시간이 지나자 달라졌다. 어깨를 당당하게 폈고 표정도 밝아졌다. 그는 "모든 걸 떠나 시원하고 가벼워 편하다"며 활짝 웃었다. 마치 새로운 것을 발견한 듯 '유레카(찾아냈다)'라도 외칠 기세였다.
이날 2시간 동안 실험을 한 결과 이씨는 노브라에 대한 다른 생각을 갖게 됐다. 그는 “패드를 덧댄 뽕브라를 입으면 제대로 옷차림을 갖춘 문명인이라는 자신감이 들고, 노브라 차림은 몸이 편안한 상태여서 자연인이 됐다는 자신감을 갖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 이씨의 노브라 도전기 영상은 19일 저녁 한국일보닷컴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노브라’에 대한 솔직한 생각
노브라 차림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어떨까. 다양한 의견들이 엇갈렸지만 ‘민망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대학생 김광진(24)씨는 “남자들도 티셔츠를 입을 때 젖꼭지가 도드라지면 부담스럽고 보기 싫다”며 “여성의 브래지어 착용은 개인의 자유지만 젖꼭지가 튀어나와 보이면 민망할 것 같다”고 말했다.
타인의 옷차림에 관심이 없지만 여자친구나 혹은 가족이 노브라 차림이라면 반대한다는 대답도 나왔다. 직장인 최상현(26·가명)씨는 “만약 여자친구나 가족이 브래지어를 벗고 다니면 남성들에게 성희롱을 당할까봐 걱정할 것”이라며 “학교나 직장에서는 옷차림도 평가대상인 만큼 정숙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예선(58·여)씨도 “브래지어가 불편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예의범절을 갖추는 차원에서 입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반면 옷차림은 개인의 자유이므로 존중해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독일에서 한국으로 유학을 온 리사(21·이화여대·여)씨도 "브래지어를 입느냐 입지 않느냐는 그저 옷차림을 결정하는 스타일일 뿐"이라는 의견이다. 이경재(58·여)씨는 "시대가 변했으니 옷차림에 대한 생각도 달라져야 한다"며 "겉으로 보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불쾌감만 주지 않으면 된다"고 답했다.
▶시민 인터뷰 영상
당신은 왜 ‘노브라’를 꿈꾸는가
왜 여성들은 다른 사람의 불편한 시선을 감수하면서까지 노브라를 꿈꾸는 것일까. 여성들의 공통된 대답은 “내가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대학생 김유나(25·여)씨는 "오랜 시간 브래지어를 착용하면 체한 느낌이 들 정도로 가슴이 답답하다”며 “한겨울에 두꺼운 옷이나 조끼를 입을 때 종종 노브라로 외출한다”고 말했다. 직장인 장하나(31·여)씨도 “브래지어의 두툼한 패드가 통풍을 막아 여름이면 가슴에 땀띠가 나거나 습진이 생긴 적도 있다”며 “만약 1년 내내 헬멧을 쓰고 다니라면 그 갑갑함을 견딜 사람이 있을까”라고 되물었다.
최근 방송에서도 불편한 브래지어가 화제였다. 걸그룹 '카라'의 멤버이자 배우인 한승연이 JTBC 드라마 '청춘시대'에 나와 집에 돌아오자마자 소파에 앉아서 브래지어부터 벗어 던지는 모습을 연기했다. 여성이라면 빠르게 훌렁 브래지어를 벗는 그의 모습을 통해 하루를 옥죈 불편함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함께 느꼈을 것이다.
노브라의 충동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것은 섹시한 가슴에 대한 강박 관념도 작용한다. 남성 중심의 시각에서 아름다운 가슴을 만들려면 도톰한 패드와 가슴을 압박하는 쫀쫀한 와이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브래지어 불편함은 잘못된 착용법 탓”
그렇다 보니 불편한 브래지어는 여성들의 건강을 해친다는 누명을 쓰기도 한다. 우선 브래지어를 장시간 착용하면 겨드랑이 림프절을 압박해 유방암 발병률이 올라간다는 속설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착용 시간보다 잘못된 착용법이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이다.
일단 브래지어의 장시간 착용이 유방암 발병률을 높인다는 속설은 의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 윤을식 고대안암병원 성형외과 교수는 “림프절 압박으로 독소가 축적된다는 이야기는 생리학적으로 근거 없는 주장"이라며 “브래지어가 겨드랑이 림프절을 압박해 노폐물 배출의 흐름을 막아 혈액순환에 좋지 않을 수 있지만 브래지어를 벗으면 금방 회복된다”고 설명했다. “꽉 조이는 청바지를 입었다가 벗을 때와 비슷한 정도”라는 설명이다. 문병인 이대목동병원 유방암·갑상선암센터장도 “유방암 발병과 브래지어 착용은 영향이 없다”며 “유방암 발병은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 수치와 출산 및 수유 경험, 비만, 가족력 등이 영향을 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브래지어의 일상적인 착용 때문에 발생하는 어깨 통증이나 가슴 압박 등을 예방하려면 브래지어를 벗는 편이 좋다. 윤 교수는 “피부염이 있거나 가슴 압박을 해소하려면 집에서 브래지어를 벗고 있는 편이 좋을 수 있다”고 말했다.
브래지어가 가슴 모양을 망치거나 가슴 처짐을 유발한다는 주장도 개인에 따라 다를 수있어서 일반화하기 힘들다. 문 센터장은 "유방이 크면 브래지어를 착용해 가슴 근육을 지탱해 주는 것이 흔들림을 방지해 일상 생활을 편하게 할 수 있고 가슴 처짐을 방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각자 상황에 맞는 브래지어를 선택하고 적정하게 착용할 것을 권유한다. 브래지어는 가슴둘레와 가슴크기에 따라 치수가 나뉘지만 브랜드와 디자인별로 자신에게 맞는 사이즈가 다를 수 있다. 따라서 매장에서 직접 가슴 사이즈를 정확히 측정해 보고 컵과 가슴이 들뜨지 않는 사이즈를 찾아서 착용해 보는 것이 좋다. 소재 역시 딱딱한 몰드 보다는 피부를 편안하게 해주는 면소재가 적절하다.
섹시해지기 위해 가슴을 모아야 한다는 압박을 버리면 브래지어는 훨씬 친근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최근 편안함을 중요시하는 추세에 맞춰 브래지어 업체들도 와이어와 패드를 버리고 홑겹 브래지어인 브라렛이나 스포츠브라, 노와이어 브라, 브라캐미솔 등을 출시했다.
이제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물론 생물학적 여성의 가슴을 가둔 브래지어 앞에서 '노(No)'를 외치는 노브라 역시 각자의 선택일 뿐이다.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박고은PD rhdms@hankookilbo.com
한설이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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