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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습기’ 정부가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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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습기’ 정부가 키웠다

입력
2016.05.0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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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습기. 게티이미지뱅크
죽음의 습기. 게티이미지뱅크

만시지탄(晩時之歎)이다. 정부가 살균ㆍ항균 기능이 있는 살생물제(바이오사이드) 전수조사 등 가습기 살균제 대책을 내놓았지만 뒷북도 이런 뒷북은 없다. 애초에 살균제 유해성분을 제대로 규제하지 않아 가습기 살균제 사태의 한 원인을 제공한 정부가 사건 발생 이후 5년 간 소극적 자세로 일관하다 이제야 대책을 내놓으면서 오히려 정부 책임론이 고조되고 있다.

3일 환경부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 후속조치의 일환으로 옥시레킷벤키저 등이 살균제 원료로 쓴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과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 외에 클로로메칠이소치아졸리논(CMIT)ㆍ메칠이소치아졸리논(MIT)에 대해서도 추가 독성연구 및 역학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2012년 2월 질병관리본부는 동물실험 결과 CMITㆍMIT 성분은 폐 손상의 원인이 아니라고 밝혀 이를 주성분으로 한 가습기메이트(애경)는 현재 검찰 수사 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하지만 2013~2015년 정부의 1, 2차 피해조사 때 애경 제품을 사용한 뒤 피해를 입었다는 접수자가 128명이나 되고 이 중 3명은 정부가 1ㆍ2단계 피해자로 인정하고도 이제서야 독성검사에 나서는 것은 “여론에 떠밀린 늑장 대응”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환경보건시민센터가 접수한 피해자 1,528명 중 CMITㆍMIT 제품을 사용한 피해자는 167명, 이 중 사망자는 37명이나 된다. 하지만 대부분 폐 손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해 문제제기가 끊이지 않았다. 애경 제품을 사용하고도 증상이 천식이어서 피해자로 인정되지 않은(4단계 판정) 이모(40)씨는 “CMITㆍMIT 제품 사용자들은 비염이나 천식, 편도염 등 다른 호흡기 질환을 얻은 경우가 많은데 피해를 인정받지 못했다”며 “지난해 8월부터 3, 4단계 피해자들이 정부에 기타 질환에 대한 판정 기준 마련을 요구했지만 묵살당했다”고 말했다.

환경부는 또 지난달 접수에 들어간 4차 피해조사를 내년까지 마무리하겠다며 국립중앙의료원을 조사기관으로 추가했다. 현재 조사기관은 서울아산병원 한 곳뿐이어서 3차 조사대상이 752명으로 1차(361명) 때보다 2배나 증가했지만 지금까지 검사를 받은 이들이 절반이 안 된다.

조사기관 확대 역시 피해자들이 오래 전부터 요구해 오던 것이다. 강찬호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가피모) 대표는 “피해 판정은 임상사례를 많이 다뤄온 의료진이 하더라도 X선 촬영, 컴퓨터단층촬영(CT) 등 기본 검진은 다른 병원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데 정부는 소극적이기만 했다”고 지적했다.

환경부 이호중 환경보건정책관은 이날 “조사기관 확대를 위해 대형병원 5곳에 협조를 부탁했지만 병원들이 책임소재 등 이유로 참여를 꺼렸다”고 하는가 하면 “3차 피해 접수자 450여명이 진료기록부 등을 제출하지 않고 신청서 한 장만 제출해 조사가 지연되고 있다”고 병원과 피해자에게 조사 지연의 책임을 돌렸다. 그러나 정부가 협조를 요청한 병원 관계자는 “지난 5년간 한 번도 피해조사 참여 의사를 묻지 않다가 지난달 29일에서야 공문을 보내놓고 참가할지 말지 답을 재촉했다”며 황당해했다. 조사를 기다리고 있는 김덕종(40)씨는 “피해 접수를 해야 한다는 사실도 몰랐던 사람들이 태반인데 정부가 제대로 안내하지도 않고 서류가 없다고 차일피일 미룬 것이 과연 조사 의지가 있는 거냐”고 울분을 토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족이 지난 2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옥시 공식 기자회견이 끝난 후 단상에 올라와 발언을 하던 도중 눈물을 닦고 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족이 지난 2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옥시 공식 기자회견이 끝난 후 단상에 올라와 발언을 하던 도중 눈물을 닦고 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이날 환경부가 내놓은 대책 중 살생물제 제품을 전수조사해 유해성이 확인되면 시장에서 퇴출하겠다는 것은 근본적인 재발 방지책으로 눈길을 끌었다. 현행법이 세정제 접착제 방향제 등 15종의 생활화학제품에 대해 위해성을 평가하는데 더해 사각지대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이조차 선진국에선 이미 90년대 말부터 시행하는 것을 뒤늦게 도입한다는 지적이다. 임흥규 환경보건시민센터 팀장은 “최소한 2011년에는 충분히 할 수 있었던 일”이라며 “유럽이 이미 1998년부터 살생물제에 관한 지침 등으로 규제해온 것과 동일한 것을 정부가 이제서야 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애초에 살균제 유독성분이 유해성 심사를 거치지 않고 제품화한 책임이 정부에 일부 있는데도 정부는 여전히 그 책임을 부인하고 있다. 1996년 유공(현 SK케미칼)은 카페트 항균제 용도로 PHMG를 제조하기 위해 환경부에 유해성 심사를 신청했고, 다음 해 환경부는 흡입독성 시험 없이 ‘유독물에 해당 안 된다’고 고시했다. 2003년 수입업체가 PGH에 대한 유해성 심사를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이들 성분은 2012년, 2013년에야 각각 유독물질로 지정됐다. 화학물질 위해성 심사를 담당하고 있는 국립환경과학원 관계자는 “당시 유독물질이 아니라고 한 것은 업체가 제출한 자료를 근거로 판단한 결과”라고 해명했다.

세종=장재진 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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