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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들고 온 히라노 게이치로 “세상사 지긋지긋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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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들고 온 히라노 게이치로 “세상사 지긋지긋해서"

입력
2017.05.24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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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게이치로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비롯해 김연수, 은희경의 소설을 읽어보았다”며 “도심 젊은이들의 심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일본 독자가 그대로 읽어도 이질감이 없을 작품들”이라고 말했다. 인터파크북DB 제공
히라노 게이치로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비롯해 김연수, 은희경의 소설을 읽어보았다”며 “도심 젊은이들의 심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일본 독자가 그대로 읽어도 이질감이 없을 작품들”이라고 말했다. 인터파크북DB 제공

“데뷔 후 20년간 가장 큰 변화요? 인터넷이 발달하고 테러를 경험하면서 독자들 일상, 관심사가 변한 거죠. 일본 순문학계에서는 이런 변화를 수용하지 않아 독자와 괴리가 있어요. 저는 문단에서 떨어져 작업합니다.”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42)는 일본 문단에 이런 냉소를 보냈다. 23일 서울 종로구 대산문화재단에서 만난 그는 “한국처럼 일본 순문학도 점점 시장이 축소되고 있지만 저의 경우 20년간 독자층이 더 늘었다”며 “작가에 따라 사정이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은 그는 25일 포럼에서 ‘문학과 시장’을 주제로 로버트 하스, 누르딘 파라, 이승우, 황선미 작가 등과 토론한다. 방한에 맞춰 신작 ‘마티네의 끝에서’(아르테)도 출간됐다.

히라노의 데뷔 초기, 이름 앞에는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교토대학 법학부에 재학 중이던 1998년 투고한 소설 ‘일식’이 문예지 신조에 권두소설로 전재됐고 이듬해 이 작품으로 일본 최고 권위의 신인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최연소 수상했다. 해박한 지식과 화려한 의고체 문장으로 ‘미시마 유키오의 재림’이란 상찬을 받았다. 탐미를 추구한 1기, 실험적 단편의 2기를 거쳐 2006년부터 ‘분인주의(分人主義·인간은 맺는 관계 따라 자아가 달라지고 이 자아의 총합이 개인의 특성을 이룬다는 관점)’를 내세운 장편을 잇달아 발표했다. 국내에도 번역된 ‘결괴’ ‘던’ ‘형태뿐인 사랑’ 등이 이 시기(3기) 작품이다.

작가는 “데뷔 때부터 3기까지 활동은 머릿속에 그려놨었다”며 “2기에 실험적인 작품을 많이 써서 초창기 독자들이 다 떨어져나갔다”고 농을 던졌다. “이런 작품을 쓰지 않고는 새로운 현대를 그릴 수 없었을 겁니다. ‘결괴’ 같은 작품은 못 썼겠죠. 저 같은 시행착오도 겪지 않은 작가들은 구태의연한 시스템에 갇혀 어려움을 겪지 않나 싶어요.” 작가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아베노믹스의 문제를 지적하며 독자들과 소통하고, 소설 속 인물이 처한 불합리한 배경을 통해 사회를 비판한다.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은 일본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 인터파크북DB 제공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은 일본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 인터파크북DB 제공

‘마티네의 끝에서’는 히라노의 20년 내공이 담뿍 담긴 연애소설이다. 작가는 “감정만 높아 상처 입히는 10대가 아니라, 일도 가정도 있는 이들의 사랑을 그리고자 했다”며 “요즘 세상사가 지긋지긋하게 느껴져서 소설에서라도 아름다운 세계를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소설은 영화 ‘라라랜드’를 연상시킨다. 기타리스트 마키노 사토시, 프랑스 RFP 통신사 기자 고미네 요코의 로맨스를 뼈대로 음악과 국제 정세에 대한 두 사람의 ‘언어의 성찬’을 이어 간다. 이라크 사태, 유고슬라비아의 ‘민족 정화’ 만행, 나가사키 원폭투하 같은 인류사의 비극이 저널리스트 요코의 취재로 펼쳐진다. 작가는 “독자와 ‘지금 여기’를 공유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부분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싶었고 (장면을 묘사하기에) 저널리스트가 최적의 직업이었다”고 말했다.

히라노는 “3기 작품들이 ‘분인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시종 일관된 캐릭터였다면, 신작에서는 인물들이 ‘분인’의 모습을 보인다”고도 했다. 작가 스스로 이 작품을 ‘4기 문학’으로 칭한다. “예를 들어 요코의 모습은 이라크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할 때, 어머니와 있을 때, 약혼자 리처드와 있을 때, 마키노와 있을 때가 다 달라요. 쓸 때는 성격이 다 달라 일체감이 없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오히려 이런 모습을 독자들이 더 리얼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데뷔 후 20년 동안 세상과 독자의 변화에 맞춰 소설의 소재, 형식을 바꿔 온 작가는 ‘언어 예술’로써의 소설을 가능케 하는 문체의 미학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소설에는 문체 뿐 아니라 캐릭터 플롯 같은 요소도 있죠. 노래로 치면 플롯은 멜로디고 문체는 가수의 목소리, 창법이에요. 노래 들을 때 멜로디만 듣고 가수 목소리 안 듣는 사람은 없잖아요? 문체가 가진 리듬, 내재된 목소리는 번역이 돼도 지속된다고 생각해요.”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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