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중요한 문화재가 국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고자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문화재 구입에 사용했던 간송 전형필(1906~1962). 음악과 함께 그가 등장한다. 수집한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 1938년 설립한 간송미술관의 전신 ‘보화각(葆華閣)’ 건물이 보이다 순식간에 내부로 이동한다. 밤이 되고 유물들이 하나 둘 깨어난다. 도자기에 새겨져 있던 학이 날아오르고 2차원 평면에 갇혀 있던 절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VR기술, 전통에 ‘판타지’ 입히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디자인박물관에서 내년 2월 5일까지 열리고 있는 전시 ‘간송과 백남준의 만남’에서 소개된 구범석 작가의 영상작품 ‘보화각’의 내용이다. 5분이 채 되지 않는 영상은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처음 시도하는 가상현실(VR) 영상으로, 장르도 다름아닌 ‘판타지’다. 관람객은 ‘민족문화의 수호자’라 불리는 간송의 소장품을 최첨단 VR 기기를 통해 감상하는 아이러니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재단의 소장품 20여 점을 모티프로 해서 컴퓨터그래픽으로 재구성한 작품은 관람객의 시선에 따라 360도로 움직인다. 카메라 이동이나 장면 전환 등에서 기존 영상과 연출을 달리해 관람객의 시선 분산을 막았다. 구범석 작가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적이라는 단어가 ‘낡았다’ ‘현대적이지 않다’는 느낌을 주는 이유는, 콘텐츠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표현 방식의 문제”라며 “가상현실이라는 현대적 언어로 우리문화의 정수라 일컬어지는 간송컬렉션을 풀어냈다”고 말했다.
가상현실 ‘투어’에서 ‘감상’으로
한 때 적용이 어려울 것이라 여겨졌던 미술 분야에서 가상현실 기술의 활용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전시장에 가지 않아도 마치 전시장에 온 듯한 경험을 제공했던 ‘투어’ 형식에서 시작한 가상현실 콘텐츠는 이제 작품 자체 ‘감상’을 목적으로 하는 수준으로 발돋움했다.
옛 서울역사를 개조한 전시장인 문화역서울284에서 바통을 넘겨 받아 6월부터 제주에서 행사를 이어가고 있는 ‘반고흐인사이드’ 전시에는 ‘밤의 카페’라는 이름의 가상현실 체험존이 마련돼 있다. 프랑스 아를에 거주할 때 즐겨 찾던 가르(Gare) 카페를 대상으로 그린 고흐의 그림을 3D로 재구성했다. VR 기기를 착용한 관람객은 마치 카페에 와 있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안전상의 이유로 이동이 제한돼, 관람객은 회전 의자에 앉아 터치 패드를 이용해 공간을 탐험하게 된다. 전시는 서울에서 약 15만 명, 제주에서 약 5만 명의 관람객(유료 기준)을 맞았다.
문화재청도 올해 상반기 조선왕릉 특별전을 준비하며 약 2억 2,000만원을 들여 가상현실 콘텐츠를 제작했다. 태조 건원릉을 대상으로 만든 인터랙티브 콘텐츠는 런닝머신 위에 선 감상자의 속도에 따라 화면이 전환돼 마치 왕릉을 직접 걸어 다니는 경험을 하게 한다. 정릉ㆍ융릉의 경우 360도 실사 영상을 4개 국어로 이뤄진 해설과 함께 체험할 수 있다.
첨단기술의 전시장 입성이 잦아진 배경에는 특유의 ‘몰입감’이 있다. 그러나 기술력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자칫 피로감과 어지럼증 등을 유발해 역효과를 낼 수 있다. “공급자 마인드로 화려한 기술을 과시하기보다 철저히 감상자 입장이 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이 조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구범석 작가 역시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게 하는 것이 주요 목표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낮은 완성도 전통적 감상 방해
그러나 ‘첨단기술을 경험한다’는 데서 오는 만족감에 비해 “콘텐츠 자체의 경쟁력은 아직 높지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제작자가 가상현실 기술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은 데다, “꽤 괜찮다”는 평을 받는 작품도 여전히 내용적 측면의 완성도보다 기술력 구현에만 초점을 둔 탓이다.
가상현실 기술이 여전히 메인 이벤트에 딸린 부차적인 작업으로 인식돼 수준 높은 작업을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도 있다. 실제로 가상현실 콘텐츠 대부분은 ‘특별관’‘체험존’ 등 전시의 부대행사에서 이용 가능하다. 올해 처음 가상현실 콘텐츠를 제작한 문화재청은 “기획전을 준비하면서 ‘가상현실 콘텐츠’도 있으면 좋겠다고 판단해 ‘전시 콘텐츠 개선’이라는 예산에서 떼와 만들었다”고 말했다.
작품과 관객 간 ‘거리두기’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방식의 감상을 오히려 방해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최근 구글과 협력해 카드보드(구글이 규격을 제정한 박스 형태의 가상현실 플랫폼)를 전시장에 배치하려다 결국 중단했다. 미술관측은 “최신기술이 작품에 대한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수 있다 판단했다”며 “미술관은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우선시돼야 하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VR은 최순실 게이트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차은택 그림자까지 드리우며 미래가 더욱 불투명해졌다. 한국콘텐츠진흥원 관계자는 “당장 내년에 콘텐츠 제작이 가능할 지조차 깜깜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문화재청 역시 “지금같이 부정적인 분위기가 이어진다면 관련 계획을 세운다 해도 추진하기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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