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실체 드러난 국정원 도청 조직
대북용에서 국내 인사로 도ㆍ감청 확대
국정원직원 자살로 민간사찰 의혹 커져
2005년 국가정보원(옛 안기부)의 광범위한 불법 도ㆍ감청 실태가 드러난 것은 내부 직원의 폭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때 존재가 밝혀진 게 일명 ‘미림팀’이다. 고급 술집의 마담을 정보원으로 활용해 미림(美林)으로 이름 붙여진 이 조직의 업무는 도ㆍ감청이었다. 주요 인사들이 자주 찾는 호텔과 한정식집, 룸살롱에서 망원으로 포섭한 지배인과 종업원이 예약정보를 알려오면 도청 장비를 미리 설치해놓고 대화내용을 엿들었다.
더 놀라운 건 도청대상 규모와 활동시기였다. 미림팀의 사찰 대상은 5,000명이 넘었다. 정치권, 고위공무원, 검찰, 법원, 대기업 임원, 언론인 등 웬만한 사회지도층 인사는 거의 미림팀의 도청망에 포함됐다. 충격적인 건 노태우 정부 때 만들어진 미림팀이 문민정부라는 김영삼, 김대중 정부 들어 대상이 늘어나고 도청 방식이 진화했다는 사실이다. 그들 자신이 사찰과 도청의 피해자였는데도 도청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권력 유지의 가장 효율적 수단이 정적의 동향 파악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YS정권 시절인 1997년 미림팀 도청 내용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한 게 대선후보들의 동향이라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김대중 등 야권 후보뿐 아니라 여권 후보인 이회창, 이인제 등 이른바 ‘7룡’의 일거수일투족을 YS정권은 손바닥 들여다보듯 보고 있었다.
DJ정부는 한술 더 떴다. 집권 직후 미림팀을 해체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도ㆍ감청 조직을 만들었다. 아예 수십억 원을 들여 휴대전화 도ㆍ감청 장비인 R2와 카스(CAS)를 개발했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휴대전화 번호를 확보해 R2에 입력해놓고 상시 감청을 했다. 그러고도 국정원은 “휴대전화 감청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국민을 속였다.
국정원이 휴대전화 해킹 프로그램 구입 사실이 드러나자 대북용이라고 했다가 해외 종북인사들에게 사용했다고 밝혔다. 과거 국정원의 변명과 너무나 흡사하다. 이전 정부에서 미림팀 소속은 국정원의 대공정책국이었고, 출발점은 방첩용이었다. 처음에는 대공용의자를 대상으로 하다 고급첩보 수집에 대한 유혹으로 점차 국내 인사들로 넓혔다. 국정원 주장대로 해외 종북인사를 대상으로 했다 해도 외국 거주와 국내 거주를 명확히 구분했을지 의문이고, 종북의 경계선도 애매할 수밖에 없다. DJ정부 국정원의 도청팀장은 재판에서 내밀한 실상을 털어놓은 바 있다. “합법 감청과 불법 감청을 병행하다 점차 불법적인 감청이 많아졌다. 상부의 ‘고급첩보 수집에 주력하라’는 지시에 따라 국내 주요 인사들로 대상을 전환했다. 나중에는 감청 대상자가 1,800여 명으로 늘었다.”
해킹 프로그램 구입과 운영을 맡은 국정원 직원의 자살로 민간인 사찰 의혹이 더 커졌다. 대북용으로만 사용했다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이유가 없고 관련 자료를 삭제할 이유는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국정원의 불법행위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국정원 직원이나 관련자들의 극단적 선택은 폐쇄적인 정보조직의 그늘을 드러내곤 했다.
해킹 프로그램 구입은 이명박 정부 시절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직 당시 이뤄졌다. 원 전 원장이 대선 개입에 관여한 점으로 볼 때 국내 사찰용으로 활용했다고 미뤄 짐작할 만하다. 더 궁금한 건 후임자인 남재준, 이병기 전 국정원장은 문제의 해킹 프로그램 사용을 인지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더구나 국정원 설명대로 프로그램이 대북용이었다면 청와대에도 보고가 이뤄졌다고 보는 게 상식이다. 이번 사건이 불거진 후 아직 한마디도 언급이 없는 청와대부터 이번 해킹 프로그램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도청에 대한 공포는 넓게 퍼져있다. 고위공직자 상당수가 휴대폰을 업무용과 개인용으로 구분해 사용한다는 건 구문이다. 야당 의원들은 도청을 우려해 화분을 사무실 안에 두지 않는 게 관행화됐다. 국정원이 아무리 민간인 사이버 사찰이 없다고 부인해도 믿지 않는 것은 국정원이 초래한 업보다. 정부와 국정원은 이런 불신을 어떻게 해소할지 답해야 한다.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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