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초부터 감시…부부관계도 거부
10년전 이메일 동호회 글까지 뒤져
휴대폰 안 주니 몇달째 대화 거부
아들 “이렇게 살아 뭐하나” 비관
지금이라도 안정적 가정 만들고파
결혼 15년 차 남자입니다. 결혼 초부터 시작된 아내의 의심으로 부부관계가 단절된 상태입니다. 저희는 흔히 말하는 섹스리스 부부입니다. 혼전에 성관계가 없었고 결혼 후에도 거의 없었습니다. 아내가 스킨십을 싫어합니다. 처음엔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맥주를 마시며 분위기도 잡아 보고, 싫다면 대화도 해보고요. 그런데 그럴 때마다 절 짐승 보듯이 하고 “변태”라고 하는 아내 때문에 심한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제 이메일과 휴대폰을 감시합니다. 결혼 초에 청구서를 확인한다고 이메일 비밀번호를 알려달라더니 거기 들어가 10년 전 이메일부터 동호회에 남긴 글까지 전부 뒤졌더라고요. ‘카풀 하실 분 구함’ 같은 평범한 글에도, 괜히 이런 말로 여지를 준다며 화를 냈습니다.
그러다 결혼 8년 차에 일이 터졌습니다. 제가 직장 동료들과 어울리다가 소위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갔는데 거기서 일하는 여자에게 술김에 연락처를 줬나 봅니다. 밤에 제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그 즈음부터인 것 같습니다. 아내가 제 휴대폰부터 가방까지 뒤지기 시작했어요. 동창회 다녀와서 주고 받은 ‘우리 오래 친구로 지내자’ 같은 문자도 사진으로 찍어 증거를 남기고 ‘왜 집적대냐’며 추궁합니다.
도저히 관계가 회복되지 않아 상담을 받았는데, 의사 선생님은 아내가 아내의 역할에 소홀하니 도리어 의심이 심해진 게 아니냐고 하더군요. 아내는 결혼 뒤 직장을 그만뒀는데 신혼 6개월까지 밥 한 번 차린 적이 없습니다. 자긴 원래 아침을 안 먹는다기에 처음엔 저도 맞춰줬습니다. 아침은 거르고 점심은 직장에서, 저녁엔 늘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보고 사갔습니다. 처음 밥을 해줬을 때 고맙다고 했을 정도예요.
그러나 이런 문제가 육아까지 이어지니 견디기 힘듭니다. 상담 후 아내는 부부관계나 살림에 이전보다는 신경을 쓰는 듯 했으나, 저한테 쌓인 불만을 애들한테 풀기 시작했어요. 큰 딸은 지금 중학교 3학년, 둘째 아들은 초등학교 5학년입니다. 방을 안 치웠거나 학습지 분량을 못 채우면 그땐 집이 뒤집어집니다. 어떨 땐 제가 다 가슴이 철렁해요. 아내는 최근 십 몇 년 만에 직장생활을 재개했는데, 퇴근하면 “야, 너 숙제 했어? 안 했지? 회초리 가져와”라고 소리부터 지르고 체벌을 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 둘째가 심리상담을 받고 싶다고 해 “왜?” 했더니 “내 속에 있는 걸 말하고 싶어”라고 하더군요. 상담 받고 한달 쯤 뒤에 우연히 아이 일기를 봤는데 거기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 세제를 마셨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날짜를 보니 벌써 한달 전이었어요. 뒤늦게 세제 회사에 전화해 성분을 문의하는 저를 보고 아내는 ‘이제 와서 그래 봐야 뭐하냐’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아내는 알고 있었더라고요. 상담 선생님을 추궁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제게 말을 안 한 거예요. 첫 상담 받기 전에 “왜 상담 받고 싶은지 아빠한테만 말해주면 안돼?” 했더니 아이가 “엄마가 갑자기 소리를 안 질렀으면 좋겠어”라고 하더군요. 더 걱정되는 건 첫째입니다. 둘째는 표현이라도 하는데 첫째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아요. 둘째의 상담선생님 말로는 애가 상담을 받다가 누나 얘길 했대요. 누나가 자기한테 “나도 사실 정말 힘들어”라고 말했답니다. 속으로 삭이고만 있는 것 같아요.
아내는 배신 당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듯 합니다. 지난해엔 제 전화에 아예 손을 못 대게 했더니 그 후로 대화를 거부합니다. 지금 몇 달 간 문자로만 얘기해요. “다 나가, 혼자 있고 싶어”란 말을 자주 해서 아들이 “그럼 뭐 하러 결혼했어?”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혼자 있을 땐 주로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 같아요.
아내는 일곱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재가하셔서 중학생 때부터 자취를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버림 받는 것에 대한 공포는 있는 것 같지만, 가정에 대한 책임감은 보이지 않아요. 저는 이 가정을 유지하고 싶어요. 그러나 혹시라도 이혼할 걸 대비해 더 악착같이 육아와 살림에 신경 쓰고 있습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안정적인 가정 환경을 조성해줄 수 있을까요.
(김정국, 가명ㆍ42세ㆍ회사원)
#어릴 때 아버지 여의고 엄마 재혼
버림받을까 두려움 떨던 유년기가
불안감 키워… 남편 아닌 아내 문제
결혼 관계가 아내 괴로움 더할 수도
상식 이하 질문 땐 단호히 거부해야
우리 인간이 살면서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다르지만 생존과 연관해 가장 자주 느끼는 감정은 불안입니다. 원시 인류가 살던 6만, 7만년 전부터 인간은 맹수나 자연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불안을 동원해 왔어요. 우리는 늘 불안을 느끼며 살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불안이 대단히 높아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도한 불안은 걱정, 분노, 수줍음 등 다양한 감정으로 이어지는데, 그 중 가장 경계해야 할 게 불안이 의심으로 가는 거예요. 불안이 의심으로 바뀌기 시작하면 그땐 걷잡을 수 없어집니다. 저는 정국씨 아내의 의심이 이 불안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해요.
사연으로 볼 때 아내는 아주 자기중심적인 사람입니다. 남을 믿지 못하고, 의심의 근거도 부당해요. 살다 보면 사람들은 계속 만나고 연락하고 부딪치고 대화합니다.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삶에서 당연히 일어나는 일들이에요. 그 일상조차 아내는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느끼기 때문에,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해명을 요구합니다. 납득의 방식조차 대단히 협소하죠. 자기 눈으로 보지 않으면 안돼요. 그러나 애초에 의심의 근거가 부적절하기 때문에, 이 사람을 납득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의심은 불식이나 해소의 대상이 아니에요. 그냥 의심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일입니다.
술집에 가서 여자에게 전화번호를 준 건, 물론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게 휴대폰과 메일을 뒤지는 이유가 될 수는 없어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완벽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지만, 그게 결혼 생활을 뒤흔들만한 잘못이 아니면 보통은 화를 내고 지적하고 끝나요. 전화번호는 왜 알려줬어, 그런 데 가는 것 싫어, 다신 가지마, 하고 끝난다고요. 그리고 정상적인 남편이라면 그 말을 받아들이고요. 그 정도로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인간이에요.
그런데 이것 때문에 의심이 증폭돼 가방을 뒤지고 상대방을 괴롭힌다면, 그건 이 사람의 문제예요. 아내의 몫이란 말이죠.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문제를 몰라요. 의심이라는 불편한 감정에서 벗어나는 데 급급해 상대방을 괴롭히면서도, 그가 의심 받을 행동을 했기 때문에 자신은 정당하고 생각해요.
그럼 아내는 왜 이럴까요. 이 사연 안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어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재가하셨죠. 아버지는 상징적으로 자식을 보호하는 존재입니다. 아버지를 잃은 인간은 본능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걱정하기 시작해요. 그럼 남아 있는 한쪽 부모에 대한 의존성이 커지는데, 아내의 경우 어머니가 재가를 하셨어요. 물론 가능한 일이지만, 자녀 입장에선 버림 받은 느낌을 가질 수 있어요.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여기는 거죠. 내 엄마가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는 사실만으로, 엄마가 외도를 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 엄마와 아빠가 성관계를 해서 나를 낳았는데, 또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한다고?’ 이런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배우자의 부정에 지나치게 몰두할 가능성이 있어요. 이런 사람은 거절과 버려지는 것에 대한 불안이 크기 때문에 막상 이혼은 원치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버림 받을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결국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는 데도 실패해요.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자신의 어두운 면을 상대에게 들킬까 봐 불안해한단 말이에요. ‘나의 진면목을 알고도 나를 사랑해줄까’,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선뜻 가까워지지도 못하면서, 조금이라도 가까워진 사람은 마치 뱃속의 태아와 같은 수준으로 통제하려고 합니다. 이런 걸 함입이라고 해요. 통제의 선을 넘어, 아예 상대를 집어 삼키는 거죠. 매우 그로테스크한 관계이고, 심각한 병리 현상입니다. 비단 부모와 자녀 관계뿐 아니라, 성인과 성인의 관계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요.
정국씨 가정의 문제는 단순히 가사분담이나 육아로 인한 갈등이 아니에요. 이 가정은 깊이 병들어 있습니다. 초등학생 아이가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느낀다는 건 존재의 의미가 흔들릴 정도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 정도면 관심이나 애정이라고 볼 수 없어요. 저는 이혼을 권하고 싶습니다. 답이 없기 때문에 이혼이 아니라, 이혼이 답이에요. 결혼이라는 틀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아내가 이렇게까지 남편과 아이들에게 경계를 넘는 행동을 하지 않았을 거에요. 결혼이란 관계로 인해 생긴 문제기 때문에 그 관계를 끊어줘야 합니다. 그게 아내의 괴로움에도 종지부를 찍는 일일 수 있어요.
그러나 이 가정을 끝까지 유지하고 싶다면, 첫째 남편은 아내에게 당신 때문에 나와 아이들이 고통 받고 있다고 확실히 전해야 합니다. 아내가 받아들이든 안 받아들이든 계속 얘기해야 해요. 두 번째, 아내를 납득시키는 일을 그만두십시오. 가령 회식하고 들어왔을 때 누구랑 갔는지, 뭘 먹었는지 등 상식 수준의 질문에는 답을 하지만, 그 선을 넘어가 캐묻는 수준이 될 땐 “그만해, 멈춰”라고 하세요. 나는 의심 받을 일을 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부터는 당신의 문제야, 나는 더 이상 설명하거나 설득하지 않을 거야, 라고 해야 합니다. “이게 안 되면 나는 당신과 살 수 없다”는 전제 하에 분명하게 입장을 전하세요. 자녀들은 좀 더 크면 기숙학교라든지, 엄마로부터 떨어져 건강한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정국씨는 남편인 동시에 아빠라는 걸 명심하세요. 아이들의 정서를 안정적으로 지켜줘야 할 의무가 정국씨에겐 있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분발해서 아빠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정리=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지면을 통해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신청해 보세요. 사연은 한국일보 사이트(http://interview.hankookilbo.com/store/advice.zip)에서 상담신청서를 내려 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오은영 박사의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에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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