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의 ‘교산 허균 문화제’에서 연주 초청을 받았다. 며칠 전 새로운 악보를 보내 왔었다. 허난설헌의 산문에 음을 붙인 가곡 ‘대들보 올리세’였다. 집을 지을 때 대들보를 올리며 기념하는 상량문인데, 그녀가 8살 때 지었다 한다. 재기가 반짝이는 이 꼬마는 동서남북 네 방향을 휘돌며 ‘대들보를 올리자 어영차 어영차…’ 채근하고 응원한다. 이제껏 난설헌을 잘못 상상하였나 보다. 차분하고 현명한 여인인 줄 짐작했건만, 약동하는 에너지가 만발하니 그 기운이 참 각별하여 부러웠다. “어영차 동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새벽에 봉황타고 요궁에 들어가 날이 밝자 해가 부상 밑에서 솟아올라 일만 가닥 붉은 노을 바다에 비쳐 붉도다. 어영차, 남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옥룡이 하염없이 구슬 못 물 마신다. 은평상에서 잠자다가 꽃 그늘 짙은 한 낮에 일어나, 웃으며 요희를 불러 푸른 적삼 벗기네.”
음악회가 열리는 허난설헌 생가에 도착했다. 기다렸다는 듯 비가 후두둑 떨어졌다. 솔밭 가까이에서 열려야 할 연주회의 성사가 불투명해질 참이었다. 솔잎들이 빗방울을 타고 건반 위로 착륙했다. 서둘러 천막으로 피신했다. 피아노 위로 방수 커버를 덮었고, 빗속에 홀로 남은 사회자는 금방 지나칠 소나기라며 관객을 안심시켰다. 그 찰나, 하늘은 으르렁 천둥소리로 대답했다. 비로 인해 일정은 조금씩 늦어졌고, 마지막 순서인 나까지는 아직 한참 여유가 있었다. 난설헌 생가 주변을 대책 없이 걷기 시작했다. 비가 점점 더 쏟아져 아예 악기가 철수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리곤 꽤 멀리까지 걸어갔다.
사진으로 장소를 수소문하는 것은 주말예능의 미션에서나 보던 일이다. 나는 카페에서, 두부집에서, 교회에서, 핸드폰 속 사진을 꺼내 들고 여기가 어디냐 물었다. 사람들은 명쾌히 대답해주지 않았다. 사진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다고도 했고, 밤하늘은 멋진데 알 수 없다는 대답도 들었고, ‘이런 길 강릉에 수태…’라는 핀잔도 들었다. 내 순서는 다가오는데, 마음이 조급해졌다. 밤이 지나면 그 길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강릉에 온 유일한 이유, 너는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터벅터벅 돌아온 길, 비가 그쳤다. 쌀쌀해진 바람에 손이 곱았다. 연주복을 갈아입기 위해 허난설헌 생가근처 어둑한 솔밭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처럼, 아니 업연처럼 연리지를 만났다. 특이하게도 소나무는 활엽수와 한 그루로 엉켜 있었다. 까닭 모를 눈물이 뜨겁게 솟구쳤다.
그리고 나는 조명이 비추는 무대로 올라가, 사회자가 전달해주는 마이크를 잡고 천연덕스레 정말 천연덕스레 강릉이 나를 얼마나 환대했는지 떠들었다. 솔향이 짙고, 두부가 맛나고, 허난설헌의 시상이 베어있는 이 공간이 나에게 얼마나 특별한지 호들갑을 떨었다. 드뷔시의 ‘달빛’과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저녁의 하모니’를 연주하면서는 물기를 잔뜩 먹어 뚱뚱해진 건반과 2초씩 딜레이 되어 들려오는 마이크의 잔향과,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상념과 혈투를 벌였다. 인생은 참 짓궂기도 하지. 뭐든 외롭지 않은 것이 없다. 커튼콜을 받았을 때, 축축한 물기 속에 끝까지 자리를 지켜준 청중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들을 수 있냐 제안했고, 마침 가진 밑천이 그 한 곡이어 흔쾌히 응했다. 다시 비가 후두둑 내리기 시작했다. 물기를 머금은 피아노 소리는 공중에 날아가질 못하고 솔향과 함께 짙게 깔렸다.
허난설헌은 죽기 직전,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소각시켰다. 친정집에 있는 그의 시와 작품들까지도 모두 태워버리라 일렀으나 누이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동생 허균은 유지를 따르지 않고 그녀의 작품을 보관했다. 누이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은 다음과 같이 울었다. “옥(玉)이 깨지고 별이 떨어지니 그대의 한 평생 불행하였다. 하늘이 줄 때에는 재색을 넘치게 하였으면서도, 어찌 그토록 가혹하게 벌주고, 속히 빼앗아 가는가?”
호텔 방 아래 일렁이는 경포대의 바다도 똑같은 소리를 내며 울고 있다. 하여, 나는 강릉과 화해했는가, 강릉을 밀쳐내지 않는가, 강릉이 좋아지는가. 우선 내일, 오늘 먹어보지 못한 초당두부부터 맛보고 생각할 사.
조은아 피아니스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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