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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성의 인생도 야구도 끝은 몰라요] <6> 제자를 짝사랑한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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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성의 인생도 야구도 끝은 몰라요] <6> 제자를 짝사랑한 교사

입력
2010.11.21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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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내 강인숙을 양곡종합고등학교에서 만났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 체육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저승사자였다. 체육교사의 활약상(?)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교문에서 지각생 단속, 장발 단속, 자율학습시간 감독, 손톱검사도 체육교사의 몫이었다. 심지어 다른 반 교사들이 벌주기 어려울 때 체육교사가 '구원투수'로 등장하기도 했다.

내가 아내 얼굴을 처음 대하던 날, 인숙은 지각해서 교실로 곧장 가지 못하고 교문 옆에 줄을 서 있었다. 대여섯 명의 남학생 틈바구니에서 인숙은 깊이 고개만 떨어뜨리고 있었다. 일단 남학생들은 팔 굽혀 펴기를 시킨 뒤 들여보냈다. 남은 학생은 인숙뿐이었다. 첫인상이 워낙 얌전해 보였다. 집에 무슨 일이 있거나 늦잠을 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넌 집이 어디니?" "양곡입니다."

"집도 가까운데 지각을 해? 또 지각할 거니?" "아니요." "그래, 어서 교실로 들어가라."

그런데 며칠 후 인숙이가 또 지각했다. "너 이름이 뭐냐?" "강인숙이요."

"다 큰 처녀가 부끄럽지도 않아? 저번에 지각했을 때 다시는 안 그러기로 약속했잖아. 오늘은 안 되겠어. 운동장에 있는 휴지나 굵은 돌멩이 주워 와라."

인숙은 그날 이후로도 몇 차례 더 지각했다. 습관적인지,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몰라도 내게 인숙은 지각 잘하는 학생으로 각인됐다. 그 이유는 나중에 밝혀졌다. 오빠 셋과 남동생 하나가 있었던 인숙은 아침부터 할 일이 많았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어머니의 부엌일을 도와야 했고 그러다 보니 지각하는 일이 잦았던 것이다.

양곡에서 한 학기를 보내는 동안 나는 시골생활에 제법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시골생활이 답답해서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새벽까지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하지만 몇 달 지나고 나니 시골 학교 체육교사로 자리잡았다. 서울로 가기보다 친구들을 양곡으로 부르는 일이 잦아졌다. 동네 사람들과도 꽤 친해졌다.

처음에는 학생들에게 호랑이 선생님으로 통했던 나였지만 차차 시간이 흐르면서 '털'이 죄다 뽑히고 말았다. 어떤 때는 큰형으로, 어떤 때는 삼촌으로, 어떤 때는 친구로 학생들과 어울리게 됐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밖에서 체육수업을 할 수 없었던 나는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베트남에 갔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내 사연들 들은 뒤 아이들은 더 가까이 다가왔다. 개인적인 고민이나 문제도 주저하지 않고 털어놓았다.

가정불화 때문에 어머니가 집을 나간 학생, 먹을 것이 없어 늘 배가 고픈 학생, 도저히 공부가 적성에 안 맞아 학교에 다니기 힘든 학생들이 있었다. 여학생을 짝사랑해서 미쳐버릴 것 같다는 학생도 있었다.

나는 그때마다 내 경험을 들려주면서 해결사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여학생을 짝사랑한다는 아이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때까지 나는 여자를 사귀어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잘해"라며 어깨를 두들겨 주는 게 전부였다. 내 조언을 기대했던 학생의 축 늘어진 어깨를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2학기를 맞았다. 어느 날 3학년 여학생 다섯 명이 교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무슨 일이지?" "저, 이번 일요일에 시간 있으시면 서울 창경원 구경 좀 시켜주세요."

지금은 창경원이 없어졌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창경원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최고의 놀이터이자 공원이었다. 창경원은 나름대로 낭만이 듬뿍 담긴 곳이었다.

창경원에 가기로 한 일요일 새벽이었다. 나는 아침도 거른 채 허겁지겁 버스 정류소로 달려갔다. 아이들은 벌써 다 모여 있었다. 매일 교복에 갇혀 지내던 아이들은 모처럼 사복으로 한껏 멋을 부렸다.

솔직히 말하면 여전히 촌스러웠지만 나는 "야, 아주 예뻐"라며 아이들을 치켜세워 줬다. 그날 나는 어려운 형편에 무리해서 돈을 썼다.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도 사주고 원 없이 구경도 시켜줬다.

창경원에 다녀온 뒤로 이상하게 인숙이가 내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게 됐다. 인숙이 생각이 날 때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내 자신을 컨트롤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럴수록 인숙의 사랑스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하도 오랫동안 외롭게 지내다 보니, 또 여동생이 없다 보니 인숙이가 귀여워서 그런 거겠지.'

그런데 학교에서 인숙이를 마주치면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그럴 때면 얼굴이 빨개지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주위에 나를 보는 사람은 없는지 두리번거리게 됐다. 참 마음고생이 심했던 시절이었다.

수업시간에도 자연스럽게 인숙이의 얼굴을 자주 쳐다보게 됐다. 그러다 얼굴이 빨개지지는 않을까 곧바로 시선을 돌리곤 했다. 아이湧?내 마음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했다.

그렇다고 인숙이에게 마음을 툭 터놓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혹시 인숙이가 충격이라도 받으면 정말 큰일이라는 걱정이 앞섰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 나는 인숙이와 한 지붕 아래에서 살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그저 일시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이러다 말겠지' 하고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려 했다. 내 마음속에 깊이 자리한 인숙의 비중을 줄이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양곡종합고등학교에서 두 학기째가 마무리돼 가던 초겨울 저녁이었다. 마을 식당에서 동료 교사들과 저녁을 먹고 있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식당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러자 다른 교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 아주머니도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선배 교사 한 명이 내게 아주머니를 소개해 줬다. "하 선생, 인사해요. 강인숙 어머니셔."

나는 순간 몸이 굳어 버렸다. 못된 짓을 하다 들킨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입사시험 때 면접관 앞에 선 느낌이었다.

"아, 아, 안녕하십니까. 하일성입니다."

내 인생에서 목소리가 가장 작았을 때였을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내 목소리는 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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