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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어른 없나요” 목마른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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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어른 없나요” 목마른 시대

입력
2016.02.2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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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인사 72명 설문

93%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절반 이상이 부재의 원인으로

“지성 사회, 자본 논리에 물든 탓”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꼽은 '어른'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법정 스님, 김수환 추기경, 리영희 한양대 교수, 김대중 전 대통령. 가운데가 얼마 전 작고한 신영복 교수다.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꼽은 '어른'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법정 스님, 김수환 추기경, 리영희 한양대 교수, 김대중 전 대통령. 가운데가 얼마 전 작고한 신영복 교수다.

“몇 년 전 외부 초청 강연을 듣고 그의 가르침을 본받아 살겠다고 마음 먹었다.” “젊은 시절 고인의 책을 읽고 느꼈던 것들을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지난달 타계한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빈소에는 매일 수천 인파가 몰렸다. 그 중에는 고인과 개인적인 친분이 없지만 책과 강연으로 가르침을 얻고 인품을 흠모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신영복’을 시대를 상징하는 ‘어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영복 현상’은 뒤집어 말하면 이 시대에 그만한 ‘어른’이 많지 않다는 방증일 수 있다. 나이 든다는 것은 더 자애롭고 더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권위적이고 더 독선적으로 변해가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한국 사회가 점점 ‘어른 부재 사회’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일보가 최근 문화예술계 인사 72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이런 실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조사에서 “한국사회에 ‘큰 어른’이라고 할만한 인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지적에 동의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93%가 “그렇다”고 답했다.

어른이 줄어드는 이유로는 절반 이상(58.7%)이 “자본의 논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지성사회”를 꼽았다.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이 공동의 이익보다 개인의 영달을 먼저 추구하면서 공동체 전체가 동의할 수 있는 어른이 사라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밖에 ‘당대와 호흡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문화 지체’(39.7%), ‘민주화 이후의 이데올로기 공백 및 가치 체계 변화’(39.7%) 등에서도 이유를 찾았다.

이들은 어른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 “시대 변화를 촉발한 탁월한 성취 및 지성과 통찰”(72.0%)을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불의에 맞서 싸운 비판과 저항 정신”(61.8%) “반대자와 약자에 대한 관용과 베풂”(45.5%) “당대와 호흡하는 유연한 사고”(44.1%) 등을 중요한 미덕으로 거론했다. “‘어른 없는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느냐”는 질문에는 “지식인들의 자기갱신과 공적 분발” “자본에 휩쓸리지 않고 인간과 생명의 본래적 가치를 돌아보는 새로운 가치관의 확립” “경험 많고 공부 많이 한 어른들이 먼저 반성하고 비타협적 사회적 발언을 해서 ‘권위 있는 가치’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답변들이 나왔다.

응답자들이 생존인물 중 어른으로 꼽은 사람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백낙청 전 창작과비평 편집인, 황현산(고려대) 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 이효재 이화여대 명예교수 등이었다. 작고인물 중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 리영희 한양대 교수, 사상가 함석헌씨, 김수환 추기경, 노무현 전 대통령, 신영복 교수, 아동문학가 권정생씨, 법정 스님, 소설가 박완서씨, 사회운동가 장일순씨 등이 거명됐다.

하지만 숫자는 적어도 어른이 점점 줄어든다고 보지 않거나 어른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한 응답자는 “‘어른 없는 사회’의 어감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며 “누구나 개인으로서 동등한 권리로 일할 수 있는, 그런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원한다”고 답했다. 또 “어른이 줄어드는 것은 다소 전근대적인 유교문화로부터 탈피하면서 점차 현대화/개인화된 사회로 이행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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