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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재 칼럼] 되살아난 ‘차떼기당’의 악몽

입력
2015.04.13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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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자금으로 번진 ‘성완종 리스트’

노무현 “나도 조사하라” 수사 지시

박근혜 천막당사 다시 세울 각오해야

'성완종리스트' 파문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13일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김무성 대표, 서청원 최고위원, 원유철 정책위의장 등이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성완종리스트' 파문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13일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김무성 대표, 서청원 최고위원, 원유철 정책위의장 등이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2년 대선 불법자금 사건으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은 ‘차떼기당’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대기업으로부터 수백 억 원이 담긴 트럭을 통째로 넘겨받은 죄과다. 나락에 떨어진 당을 구한 건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였다. 대표 당선 직후 국회 앞 당사를 매각하고 여의도 공터에 천막을 설치하고 당사를 옮겼다. 처음에는 ‘정치 쇼’로 치부됐으나 두 달 넘게 먼지구덩이 천막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서 민심이 움직였다. 그 결과 50석도 힘들다는 총선에서 121석을 얻으며 기사회생했다.

‘성완종 리스트’를 접한 박 대통령의 뇌리에는 순간 예전의 천막당사 시절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싶다. 정권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혔을 법하다. 현직 총리, 청와대 전ㆍ현비서실장, 여당 중진의원, 시ㆍ도지사 등 정권의 핵심 실세들이 죄다 연루됐으니 말이다. 게다가 대선자금은 정권의 정통성과 직결된 문제다. 대통령조차 그물망을 벗어날 수 없게끔 돼있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단돈 110원을 들고 상경해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기업인과 정치인으로 성공했다는 자존감이 ‘표적수사’로 무참히 짓밟혔다는 서운함과 억울함이 메모를 남긴 배경으로 짐작된다. 죽음 직전 남긴 육성파일에는 누군가를 음해하려는 흥분이나 억지가 느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차분하게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당사자들의 완강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메모내용이 터무니없어 보이지 않는다.

박근혜 정권은 역대 어느 정권보다 높은 도덕성과 청렴성을 강점으로 내세웠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과 2012년 대선에서 ‘클린선거’를 표방했다. 그런 자부심이 산산조각 나게 됐다. 집권 3년차 증후군에는 정권실세들의 돈 추문이 어김없이 불거진다. 정권 초반 권력의 서슬이 퍼럴 때는 잠복해 있던 것이 힘이 빠지면서 분출되곤 했다. 성 전 회장의 리스트는 어찌 보면 권력의 부침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다. 실세들의 비리와 불법이 없었던 게 아니고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라고 보는 게 상식적이다.

현 정권은 국가정보원 선거개입, 인사 난맥, 세월호참사 부실대응, 비선실세 개입 등 숱한 악재가 이어졌어도 돈 문제가 불거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파문으로 마지막 버팀목마저 무너질 상황에 놓였다. 박 대통령으로선 상상조차 하기 싫은 악몽일 수밖에 없다. 내심 사실이 아니기를, 설령 맞다 하더라도 최악의 결과는 아니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서일까. 청와대 대변인이 대신 읽은 박 대통령의 지시에는 그리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성역 없이 엄정히 수사하라”는 상투적 지시만으로 검찰이 퍼렇게 살아있는 정권의 2인자, 3인자를 법과 원칙대로 처리할 거라고 보는 국민은 드물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대선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특별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직접 대선자금 공개를 제안하고 수사를 지시했다. “검찰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나에게 조사받으라고 하면 받겠다”고까지 했다. 사시 동기로 당시 대선자금 수사를 지휘하던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에 대해서는 “잘하는 것이다. 검사가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이 조사로 노 전 대통령을 도왔던 재계 인사들을 포함해 정치인 등 수십 명이 처벌받았다.

박 대통령이 진정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다면 직접 국민 앞에 나와 검찰에 분명하게 지시를 내려야 한다. “혐의가 있으면 측근은 물론 나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박 대통령은 천막당사로 이전하면서 “한나라당은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국민에게 지은 죄를 진심으로 참회하면서 새로운 한나라당의 길을 설계하고자 한다”며 이를 악물었다. 11년이 지난 지금 박 대통령은 천막당사를 다시 세운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대선 불법자금 수수가 드러나면 상처를 입겠지만 그것을 덮으려 한다는 인상을 주면 더 헤어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된다. 사즉생(死卽生)은 바로 이럴 때 필요한 말이다.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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