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전 대통령 보이체흐 야루젤스키가 5월 25일 숨졌다. 우리는 그를 폴란드 공산당 마지막 독재자이자 레흐 바웬사가 이끈 구 소련 연방 최초의 자유노동조합 ‘연대(솔리데러티)’ 탄압의 장본인으로 기억한다. 국내 언론들도 짧은 부고기사에서 그를 그렇게 소개했다.
반면 서방 언론들은, 매체에 따라 조금씩 어조는 달랐지만 대부분 그를 ‘논쟁적인 인물’로 조심스럽게 묘사했다. 가디언은 “애국자였나, 꼭두각시였나, 아니면 실용주의자였나?”라는 물음으로 그의 부고 기사를 시작했고, 바웬사는 ‘TVP Info’와의 인터뷰에서 “심판은 신에게 맡겨야 한다”며 판단을 유보, 넌지시 그를 옹호했다. 로이터통신은 그의 장례 의전과 장지를 둘러싸고 폴란드 여론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야루젤스키는 참담한 시대의 권력자로서 여러 어려운 선택들을 했고, 그 선택들은 그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주로 기여했지만, 약화할 때도 있었다. 적어도 그의 삶은, 일부의 비유처럼 ‘폴란드의 전두환’으로 단순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야루젤스키의 생애 내내 조국 폴란드는 구 소련의 속국이었다. 16세기 발트해와 흑해 사이의 광활한 땅을 지배하던 동유럽 노(老)강국의 위엄도, 모스크바로 기병을 몰아가던 패기도, 오스만제국에 맞서 유럽 가톨릭 세계를 지켜주던 방패로서의 자부심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18세기 말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3국의 분할지배로 아예 지도에서 사라진 적도 있었다. 나폴레옹의 ‘바르샤바공국’ 시절의 몇 년을 빼면 근 200년 동안 사실상 러시아의 식민지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할 때까지, 제정러시아는 폴란드 민중들의 독립 봉기를 철저히 봉쇄했다.
소련 속국의 군사 엘리트 1923년 토지귀족 집안서 출생 소련의 나치 대항 전투에 참전 폴란드 군 실력자로 초고속 승진
야루젤스키는 독립 직후인 1923년 7월 6일 폴란드 남동부 쿠루프의 전통적인 토지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보수적인 가톨릭학교에서 교육받으면서 사회주의와 러시아정교에 대한 반발심을 키웠다. 요컨대 그는 ‘인민의 적’이었다. 독소불가침조약 이후 독일과 러시아가 폴란드를 분점(1939)하면서 그가 누렸던 신분적 특권과 부는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16살의 그는 카자흐스탄 탄광(bbc보도)과 시베리아 벌목장(뉴욕타임즈, 이하 nyt)으로, 그의 부모는 시베리아 강제노역장으로 끌려간다. (nyt는 야루젤스키가 소비에트 신분증을 발급받길 거부해 3주간 투옥된 적도 있다고 보도했다.) 그게 부모와의 생이별이었다. 아버지는 이질로 시베리아에서 숨졌고, 어머니의 행적과 생사는 훗날 권력자 야루젤스키도 확인하지 못했다. 야루젤스키에게 씌어진 ‘스탈린의 꼭두각시’나 ‘러시아의 허수아비’라는 오명은 20대 이후의 삶을 통해 해명돼야 할 것이다.
변신의 계기나 동기는 불확실하다. 다만 기회가 있었고,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직후 러시아(구소련)는 폴란드인들로 구성된 군대를 조직, 대(對)나치 전선에 투입한다. 젊은 야루젤스키도 참전한다. 강제노역보다는 군대가 나았을 것이고 나치 역시 침략자인 만큼 얼마간의 민족주의도 그 선택을 부추겼을 것이다. 그는 대세를 읽고 처신할 바를 정하는 데 능란한 현실주의자였고, 또 빼어난 군인이었다. 45년 5월 나치와의 베를린 마지막 전투에 그는 참전했고, 당시 그의 계급은 중위였다. 전후 소비에트 정부의 명령을 수행하는 속국 인민군 장교로서, 그는 반정부(반소비에트) 레지스탕스 소탕전에서도 적잖은 공을 세운 듯하다. 47년 입당한 그는 폴란드 고급보병학교와 참모학교를 졸업하고, 56년 러시아가 군사작전권을 폴란드로 이양한 뒤 초고속 승진한다. 56년 33살에 폴란드 군 최연소 장군, 60년 군 최고위 정치장교(코미사르), 64년 군 참모총장, 68년 국방부장관. 야루젤스키는 국방부장관이 되기 직전인 68년 8월 바르샤바조약군의 일원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 ‘프라하의 봄’을 짓밟았다. 그 해에 그는 군대 내 유대인 숙군(肅軍)) 작업도 병행했다.
속국의 군사 엘리트로서 그의 현기증 나는 출세에는 종주국 권력자(스탈린)의 전폭적인 지원과 신뢰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그는 믿음직한 식민지 군사 관료였고, 공산당 고위층이었다. 70년 당정치국 후보위원, 71년 정식위원. nyt는 군인 야루젤스키의 다양한 장점들로 영리함, 사려 깊음, 엄격함 등과 함께 철저한 금주 습관과 청렴성을 들고 있다. “당시 소비에트 군대는 알코올 중독에 대한 공포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술을 일절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정적들조차 그의 청렴함만은 부인하지 않았다.”(2014.5.27)
토지 국유화와 집단농장화 등 소비에트 체제의 폴란드 경제는 60년대 이후 급속도로 악화했다. 70년 발트해 조선 노동자들은 식량 폭동과 파업에 나섰고, 진압 과정에서 40여 명이 사살되고 1,000여 명이 부상 당한다. 야루젤스키는 퇴임 후 당시의 발포 책임을 규명하는 의회 청문회에서 자신의 책임을 부인했다. 가디언은 그의 편을 들었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주저앉힘으로써 독자적인 입장(발포 반대)을 고집했고, 정치국은 경찰과 내무부 소속 보안 인력을 동원해 폭동을 진압했다. 이후 유혈 진압의 책임을 물어 고무르카 당시 총리의 사임 압박에 나선 주요 인물 가운데 한 명도 야루젤스키였다.”(2014.5.25) 반면 nyt는 “야루젤스키 장관은 즉각 군대를 동원해 폭동을 진압했고, 그 사건을 기점으로 야루젤스키와 폴란드 군은 국외보다 국내 보안군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폭동은 진압됐지만 폴란드 경제는 호전될 기미가 없었고, 외채는 쌓여갔다. 76년 정부는 식료품값을 대폭 인상했고, 일부 품목은 인상률이 60%에 이르렀다. 전기기술자 바웬사가 이끄는 그단스크 레닌조선소 노동자들의 파업과 잇따른 민중봉기는 폴란드 국내정치의 최대 불안요소였다. 폴란드 정부는 임금 인상과 함께 노동조합을 합법화했고, 80년 9월 자유노조 ‘연대’가 출범했다. 폴란드 인구의 1/4이 ‘연대’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고, 그 가운데 1/3이 공산당원이었다는 점도 ‘연대’합법화의 배경이었을 것이다. ‘연대’는 노동자들의 자유선거를 통한 공장 자주관리를 요구하며, 당에 맞서는 거대 정치집단으로 성장했다.
당시 소련 수상이던 브레즈네프는 ‘연대’의 세력화와 폴란드 정세에 촉각을 곤두세웠을 것이다. 물러터진 당과 정부가 미덥지 않았을 것이고, 그 불신은 폴란드 군(야루젤스키)을 더 의지하게 했을 것이다. 야루젤스키는 81년 2월 수상에 임명됐다. 소련은 당시 당제1서기였던 카니야와 신임 수상에게 계엄령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고, 바르샤바 조약군은 폴란드 국경에 집결해 제2의 프라하 사태를 암시했다. 그해 10월 모스크바는 야루젤스키에게 당제1서기직까지 맡긴다. 폴란드 당정의 최고 권력자가 된 야루젤스키는 두 달 뒤인 12월 12일 계엄령을 선포, 수도로 탱크를 불러들인다. ‘연대’는 불법화됐고 바웬사를 비롯한 노조 간부 1,000여 명이 투옥된다. 서방 국가들은 즉각 정치 경제제제에 나섰고, 미 CIA는 미국노동총연맹-산업별조합회의(AFL-CIO)를 앞세워 조직적인 솔리데러티 지원활동을 전개했다.
참혹한 시대의 권력자 1981년 2월 수상 자리에 올라 자유노조 '솔리데러티'에 맞서 계엄령 선포하고 바웬사 투옥
81년 계엄령과 노조 탄압의 책임 공방은 야루젤스키 평가와 관련된 가장 첨예한 분기점이다. 야루젤스키 자신으로서도 수상이 된 뒤 10개월, 당제1서기가 된 뒤 2개월은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텔레그라프는 25일자 부고 기사에서 덜 알려진 사연 하나를 소개했다. 야루젤스키는 수상이 된 뒤 소련의 계엄령 선포 압박을 무마하기 위해 10개항의 경제회복 프로그램을 마련, 바웬사와 가톨릭주교단에게 3개월간의 무파업 협력을 요청해 수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해 9월 로즈시 직물노조가 파업에 나섰고, 유예 협상도 무위로 끝났다. 즉 야루젤스키의 계엄령은, 훗날 그의 해명처럼, 조국이 ‘피바다(bloodbath)’가 될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한 ‘차악(lesser evel)’의 선택이었다는 의미다. 81년 2월 가디언은 사설에서 “(야루젤스키 신임 수상은) 솔리데러티(연대)와 교회를 포용하고, 경제 쇄신을 이끌 수 있는 진정한 조력자”라고 쓰기도 했다. 하지만 nyt는 그가 계엄령 선포를 미룬 까닭을 “솔리데러티를 분쇄하는 걸 꺼렸기 때문이 아니라 계엄 성공 여부가 불투명해서였을 것”이라고 썼다. 군대 역시 솔리데러티의 영향력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그 판단의 근거다. 한편 bbc는 러시아 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이 공개한 자료를 인용, 당시 다수의 정세 판단과 달리 소비에트는 폴란드를 군사적으로 장악할 계획이 없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2014.5.25)
그는 1년 뒤인 82년 말 계엄령을 잠정 중단했고, 이듬해 해제했다. 바웬사나 교회와의 대화도 재개, 사실상 솔리데러티를 인정했다. 그의 유연한 조치는 당내 강경파의 반발을 샀고, 비밀경찰이 가톨릭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을 살해하는 일로 이어지기도 했다. 야루젤스키는 책임자와 관련자 전원을 처벌했다. “그가 원한 것은 개혁과 화해였다”고 가디언은 썼다. 브레즈네프 사망 이후 80년대 소련의 동구권 장악력은 잦은 권력 교체로 크게 약화했다는 점도 감안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 85년 고르바초프가 등장한다. 62세의 야루젤스키는 70, 80대 노령의 동구권 지도자들과 달리 고르바초프와 가장 말이 잘 통하는 인물이었고, 페레스트로이카에 가장 먼저 찬동한 동구권 정치인이었다.(가디언)
반발 딛고 솔리데러티 인정 1989년 대통령 돼 이듬해 사임 올해 5월 숨진 후 평가 엇갈려 바웬사 "심판은 신에게 맡겨야"
그리고 당시 폴란드 경제는 서방 국가의 경제제재까지 겹쳐 붕괴 직전이었다. 89년 그는, 역시 강경파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솔리데러티와 2개월에 걸친 ‘라운드 테이블’을 갖고, 반자유총선거에 합의한다. 89년 6월 총선에서 솔리데러티는 상원 전석을 석권하고, 하원 161석 가운데 160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둔다. 라운드테이블 합의에 따라 야루젤스키는 폴란드 대통령에 선출되고 그는 솔리데러티의 타데우스 마조비에츠키를 총리에 임명한다. 그리고 이듬해 바웬사의 대통령선거 요구를 수용, 대통령직을 사임한다. 1990년 12월 고별연설에서 그는 공산정권 시절 모든 과오의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며 “’사죄한다(I apologize)’는 말은 진부하지만, 그 말을 대신할 다른 어떤 말도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96년 폴란드 의회는 야루젤스키의 70년 폭동 진압 책임을 묻는 청문회 직후 표결을 통해 그에게 법적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하지만, 2008년 ‘국가 기억위원회(Institute of National Remembrance)’는 그를 계엄령 선포의 위법성을 들어 그를 기소한다.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재판을 회피, 최종 판결은 받지 않았다. 1993년 그의 자서전 왜 계엄령이었는가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95년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4%는 그의 계엄령을 필요한 조치였다고 응답했고, 2011년 조사에서는 44%가 그를 편들었다. 한편 2009년 한 여론조사에서는 그가 부정적인 인물로 기억될 것이라는 응답(46%)이 반대편(42%)보다 많았다.(이코노미스트, 2014.5.27)
퇴임 이후 그는 교회에 버젓이 다니는 과거의 동지들을 비웃는 등 고집 센 좌파라는 이미지를지켰지만, 2003년 폴란드의 EU 가입은 ‘애국적 선택’이라며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나는 나의 판단에서 어떠한 도덕적 모순도 찾지 못한다. 한때 우리는 소비에트의 영향권 안에서 살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 폴란드로서는 서방과 손을 잡는 것이 최선이다.”(텔레그래프, 2014.5.25)
짙은 선글라스와 꼿꼿한 자세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였고, 그런 외모는 완고한 군인 정치가의 이미지를 국내외적으로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그의 선글라스는 시베리아 강제노역 시절 눈빛(雪光)으로 다친 눈을 가리기 위한 거였고, 자세 역시 척추 부상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5.16 당시 박정희의 선글라스나 5.17 직후 전두환의 거만한 몸짓과는, 사연도 의미도 달랐다.
야루젤스키는 5월 30일 바르샤바 국군묘지에 안장됐다. 하지만 장례는 국장이 아닌 군인장으로 치러졌다. 코모로프스키 현 대통령의 절충안이었다. 그는 장례식에 불참하는 대신 바웬사, 크바스니에프스키 전 대통령과 함께 장례미사에만 참석했다. 조사에서 그는 바웬사의 평가를 반복했다. “고인은 폴란드 전후 역사의 가장 어렵고 극적인 결정의 책임을 짊어졌던 군인이자 정치인이었다. 이제 그에 대한 심판은 신에게 맡겨졌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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